뽀득여사는 가게에 있는 것이 힘들게 일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굳이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크지는 않다. 하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우리의 감정 충만 뽀득여사에게도 ‘가을바람’이 들었다.
‘오늘 뽀득 여사는 여기 없어요’
작은 팻말을 가게 앞에 걸어 놓았다. 뽀득 여사는 오늘 하루종일 가을놀이를 할 작정이다.
커피와 샌드위치 약간의 비스킷과 상큼한 과일 몇 가지를 썰어놓은 과일샐러드를 챙기고 따뜻한 무릎담요 그리고 며칠 전 새로 읽기 시작한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 책과 그리고 돗자리…. 간단하게 챙긴다고 챙겼지만 제법 큰 피크닉바구니가 꾸려졌다.
사랑스러운 아가는 커다란 은행잎 같은 톤 다운된 노란 점퍼를 입었다. 이 가을에 딱이다. 단지 너무도 눈에 띄게 새겨진 ‘good puppy’ 글자만 빼고는 아가의 맘에도 쏙 드는 디자인이다. 아가는 정신없이 발발거리고 뛰어다니며 ‘멍멍’ 짖어대는 여느 강아지들과 자신을 동급으로 여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산책을 나올 때는 좀 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납작한 코를 최대한 도도하게 길게 빼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는 친구 하자며 발발발 달려오며 ‘멍멍’ 짖어대는 강아지들에게 나름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 보이는 것이다.
‘어허, 나는 너희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그러나 그런 노력이 헛되게도 늘 고만고만한 강아지들은 우리의 아가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하긴 아가의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기에는 아가의 모습은 너무도 귀엽기 때문이다.
“아가야, 가을이 있는 나라에 태어나서 정말 행복하네. 가을이 점점 짧아져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또 길지 않아서 그만큼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만약 1년 내내 가을이라면 이렇게 이 계절이 설레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글쎄요. 만약 할머니가 제가 좋아하는 따뜻한 딸기우유와 카스텔라를 1년 내내 주신다고 해도 저는 매일매일 설렐 것 같아요. 꾸잉.’
“호호호, 이런 먹보 같으니라고. 아무렴 그렇겠지.”
가을이 한창인 호수공원은 한 폭의 그림이다. 뽀득여사는 이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에 자신과 아가가 그 그림의 일부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 체크무늬 돗자리를 폈다. 평일이라서인지 공원은 한산했다. 넓은 공원에 딱 적당한 만큼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가을수채화 작품에 등장하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모든 게 완벽할까! 이렇게 아름답고 평안한 작품이라니. 오우 감사하기도 하지. 그렇지 아가야?”
아가는 어느새 가을 햇살에 취해서 까무룩 잠이 들어 있었다.
뽀득 여사는 테두리에 작은 테슬이 앙증맞게 달려있는 챙이 제법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다. 그리고 가을바람에 서로 몸을 부딪히는 단풍잎사귀들의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뽀득여사는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을 읽고 있다.
‘터키사람들의 정서가 참 우리와 비슷하네’라고 느끼며 한참을 책 속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순간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목덜미가 스산해지면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깜박 잠들었었나 보다. 읽던 책이 책장이 덮인 채 돗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터키의 정서가 우리와 참 비슷하지요?”
뽀득여사는 깜짝 놀라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앗! 이 목소리, 이 미소. 뽀득여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막 졸음에서 깨서인지 아니면 뜻밖의 연속된 만남의 어리둥절함 때문인지 뽀득여사는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어이쿠, 제가 실례를 한 것은 아닌지요. 마침 익숙한 책이 보여서요. 저도 얼마 전에 이 책을 읽었거든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읽고 있어서요.”
가을의 마법. 뽀득여사는 이런 우연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더욱 말이 안 나왔다. 노신사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러게요. 제목은 ‘내 마음의 낯섦’인데 묘하게 이 책은 낯설지가 않네요.”
뽀득여사는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네. 사람도 분명히 낯선 사람인데 낯설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저번에 길에서 뵈었을 때도 낯설지 않았거든요.”
노신사의 말에 뽀득여사는 볼이 붉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자신도 모르게 모자챙이 깊게 내려오게 만들었다.
“네. 우연히 또 뵙다니…. 우리나라가 좁기는 좁은가 보네요. 마침 커피 한잔 마시려던 참인데, 한잔 드릴까요?”
“제가 귀찮게 해 드린 것은 아닌지….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한국에도 도심에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니…. 우리나라도 살기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정말 아름답네요.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사시지 않으신가 보네요. 인공호수이기는 하지만 정말 조성이 잘 된 곳이지요.”
“한참 전에 호주로 이민 갔었지요. 멜버른으로요. 저번에 길에서 처음 뵈었던 날이 한국에 막 들어온 다음날이었어요. 오늘 호수공원은 꼭 멜버른의 공원 같네요. 조금 더 사람의 손길로 다듬어져 있다는 차이는 있지만요.”
“멜버른이요? 저도 한 20년 전에 멜버른에 여행 간 적 있었어요. 도심의 트램과 아름드리나무들 하며 정말 아름다운 곳이더라고요. 한국에는 잠시 들르신 거예요?”
“글쎄요. 잠시인지 아예인지 딱히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인지 모르겠는데, 반드시 멜버른 또는 한국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딱히 없거든요.”
“자유로운 영혼이시네요.”
“하하하, 오늘 벌써 세 번째네요.”
“네? 뭐가요?”
“오늘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말을 세 사람한테 들었거든요. 우리 딸하고 우리 손녀 그리고 저기…. 그러고 보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되는지 모르겠네요.”
뽀득여사는 순간 ‘아니겠지. 지금 이것도 너무 우연인데, 설마 아닐 거야.’ 하면서도 묘한 직감이 발동하면서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손녀이름이….”
“새미, 은새미요. 성이 독특하지요.”
“호호호, 그리고 매우 순수하고 예쁘지요.”
“네. 순수하고 예쁘…, 네? 우리 새미를 아세요?”
“만약, 올해 스무 살이고, 은빛아파트에 살고, 단발머리 하얀 얼굴에 귀여운 통통한 볼 그리고 날짜를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한다면….”
“딱 맞아요. 맞아요.”
“그렇다면 제가 아는 새미가 그 새미가 맞는 것 같네요. 호호호”
“이럴 수가! 순간 머리가 쭈뼛 서는 걸 느꼈어요. 이래서 세상은 재밌는 것인가 봅니다.”
뽀득여사와 멜버른 노신사의 웃음소리에 단잠에 빠져있던 아가가 ‘꼬물락 꼬물락’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아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짧은 목을 좌우로 돌려가며 뽀득여사와 노신사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가을은 이렇게 낯섦마저도 낯설지 않게, 우연마저도 필연처럼 만드는 마법이 일어나기에 ‘딱’ 좋은 계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