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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해야 된다‘ 부터 알려준 회사

07 | 직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by 아우구스티노



나의 회사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Spoil’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정말 그때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나고 나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팀에 배치되고, 바로 다음날이었다.


나보다 3년 먼저 입사한 나의 사수 - 실제로는 4살이 많았는데 - 손주임님이 나를 회의실로 부른다. 배치받은 첫날 이용했던 VIP실과는 다른 이 회의실에는 큰 칠판이 하나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정말 아무 말도 없이 아직 전혀 친해진 것도 없는데, 나에게 호구조사를 하는 것도 없이, 대화가 1도 없었는데..!


너무 뜬금없이 칠판에 엄청 큰 글씨를 휘갈겨 쓰면서 물어본다.


Spoil.
무슨 뜻인지 아세요?


'응. 뭐지? 왠 갑자기 영어. 뜻이 뭐더라. 망가지다 뭐 그런 거 아닌가? 다행이다. 아는 단어라서. 근데 갑자기 왜 저 단어를?'

"스뽀일(Spoil), 망가지다는 뜻 아닌가요."


"한결 씨, 잘 들어요. 이 단어를 잘 기억해야 해요."

'응? 왜..?'

"네?"

나에게 정말 좋은 것을 많이 알려준, 항상 귀감이 되었던 나의 사수는 처음 며칠간은 나에게 존댓말을 썼었다.


"우리 팀에 있다 보면, 망가지기 쉬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마 이제 겪게 되겠지만, 우리가 보통 정말 좋은 거 먹고, 좋은 데 가고, 해외도 좋은 곳만 가고 그러거든요."


내가 서울사무소로 와서 처음으로 배치를 받은 곳은 IR이라는 부서였다. Investor Relations의 줄임말이고 주식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회사를 설명하는 부서라고 얘기하는 것이 우리 부서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일 것이다. 이미 어젯밤에 IR이라는 부서에 대해서 공부를 한 터라,

'이 팀이 뭐하는지 대충은 알겠는데, 저렇게 좋은 것만 하는지는 몰랐네. 그래도 그렇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그렇게 다니다 보면, 자기 스스로 붕 뜨게 돼요. 잘난 줄 알게 되죠. 근데 자기가 잘난 게 아니거든. “

"네, 그렇죠.."

"애널리스트나 세일즈들이 잘해주면서 접대를 하는데, 근데 그걸 그냥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돼."



우리 뒤에 회사가 있으니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거지,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해주는 게 아니거든.



"아, 네."

"그래서 절대 애로건트(arrogant)하게 굴면 안 돼. 여기 부서에서 일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사람들 많아. 절대 잊지 마세요."

손주임님은 중간중간 영어를 많이 섞어서 썼다. 처음에는 ‘뭐야. 좀 재수 없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도 나중에 내가 영어를 많이 섞어 쓰고 있는 걸 보면서 ’ 나도 많이 물들었구나.’ 싶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스포일... 뭐야. 처음 보자마자 저런 얘기를 들려주시네. 내가 좀 허세를 떠는 사람처럼 보였나.'


칠판을 다시 한번 톡톡 치면서,

"Spoil. 사람들이 앞에서 잘해주잖아. 근데 뒤에 가서 건방지다고 욕해.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우리보다 학력도 뛰어나고, 돈도 많이 받고 훨씬 잘난 사람들이야 사실. 근데 그냥 우리 뒤에 회사가 있고, 우리 회사를 가지고 그들이 장사를 해야 하니까

그 관련부서인 우리에게 잘해주는 것뿐이야."


말하면서도 더욱 확실하게 얘기해줘야겠다 싶었는지,

"우리가 만나는 사람 중에 우리보다 못난 사람 하나도 없다고 보면 돼. 그러니까, 절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잘해준다고 건방져지거나 그들의 접대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러면 안돼."

저렇게 열심히 얘기해주고 있는데, 이럴 때는 대답이라도 확실하게 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은 잘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점점 알게 될 거야."

'네, 진짜 지금은 모르겠네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근데 사실 이 날만 해도 나는 잘 몰랐다. 뭐 얼마나 대단한 게 있다고 이렇게까지 신입사원이 오자마자 이것부터 알려주나 싶었다.


그런데 아,

왜 이 얘기부터 한 건지 깨닫는 데에는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팀의 업무는 투자자나 애널리스트 등을 대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다 보면 대부분 좋은 식당을 가고, 서울의 최고급 호텔에서만 컨퍼런스가 열리고, NDR을 하면 차량을 보내주고, 해외출장을 가도 언제나 최고 좋은 호텔을 이용하고,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 홍콩 싱가폴, 도쿄 등을 수시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럭셔리한 회사 생활은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었다.


뉴욕의 공연장에서, 런던의 박물관에서, 싱가폴의 센토사에서, 출장 중에 짬이 나게 되어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진짜 출세한 것 같았고,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된 마냥 착각도 하곤 했다.



'아 이래서, 완전 첫 만남부터 이 얘기부터 해주고 싶었나 보구나.'

'본인도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겠지. 망가질 뻔한. 그런 걸 이겨내는 것이 어려웠으니 나에게 신신당부를 해주고 싶었나 보다.'


손주임님의 그 얘기가 아니었어도 나는 그렇게까지 속물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속물이 더 되었을 수도 있다.) 그 얘기가 나에게 계속해서 맴돌며 내가 건방지게 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방어막이자, 양심의 슈트(Suit)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뒤에 회사가 있어서 나에게 잘해주는 거다.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두면 전혀 나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착각하지 말자. 착각하지 말자. 망가지지 말자.'


그렇게 나는 회사생활 내내 가슴에 새기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다.




나는 Spoil이라는 단어를 지금도 좋아(?)한다.

그 단어를 보면, 지금도 그 상황을 떠올리게 되고 정말 좋은 것을 배웠구나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나의 회사 생활에서 선배에게 정말 잘 배웠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일 중에 단연 손꼽히는 얘기이다.


그래서 이 일을 잊지 않고 후배들에게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준다. 지금 나는 자금팀에 있는데 자금팀도 어느 정도는 갑의 위치에 있는 부서로서, 다양한 접대를 받을 텐데 절대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뒤에 회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해주는 거라고,

스뽀일! 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곤 한다.


후배들도 아마 '저 선배가 왜 저런 얘기를 하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서는 나처럼 나중에 깨닫게 되리라 기대한다. 내가 그랬듯이 좋은 걸 배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혹시라도 어디선가 거래관계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잘해준다면, 그것은 내가 잘난 것이 아니고 내 뒤에 있는 회사를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언제나 겸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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