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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우구스티노 Jan 13. 2023

자기소개 한번 하고 퇴사를 떠올리다.

10 | 고대 FM으로 시범? 자괴감은 어쩌라고.


- 2023년 아니고 아득하게 오래된 2005년 이야기입니다 -


오늘은 기획부문 전체 회식이다. IR팀은 기획부문에 속해 있었는데, 부문 전체 회식은 처음이다. 부서 배치받은 지 보름 정도 지난 시점에 한 달에 한번 하는 부문 간담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간담회 이후에 신입사원(나)도 왔고 해서 회식을 한다고 했다.


사실 기획부문에 신입사원이 오는 건 흔한 경우가 아니다. 여기는 전사 기획부문이라, 보통 전사에서 잘한다는 사람들을 뽑아오는데 당장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입사원이 필요가 없다. 부문의 업무가 진짜 너무 빡센데도 사람들이 전사에서 뽑히면 부서이동을 승낙하는 이유는 해외주재원, 지역전문가, 그리고 MBA 선발 등의 기회를 염두에 두거나 승진누락이 별로 없다는 점 때문이다.


암튼, 큰일이다.

술 못 먹는 사람을 봐줄 리 없기 때문에, 드디어 나는 오늘 쓰러지게 될 것이다.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수원 내려가는 버스를 탄다. 팀의 선배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지만, 나는 마음의 무거움이 발로 전해져 마비가 온 듯 쉬이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우선 기획부문 간담회에서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는데, 별로 빡세지는 않았다. 그냥 편하게 넘어갔다.

‘음. 좋은데? 그래도 심하게 시키지는 않네. 좋아..’


착각이었다. 술자리에서 자기소개가 제대로 있을 줄이야. 간담회를 끝내고 자리를 옮겨, 삼겹살 집 2층에 우리만 자리하였다. 여러 번 간 곳이었는지 사람들의 몸놀림은 매우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사장님과의 유대관계 역시 눈에 띄게 좋아 보였다. 누가 봐도 기획부문의 단골 식당인 게 확실했다.


이제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한다. 그룹연수에서 배운 대로 상석은 어디고 차석은 어디에 앉고, 그렇게 각자의 자리를 찾아서 앉는다. 말단의 자리는 배웠지만 완전 초짜 신입사원이 앉을 자리는 배우지 않았기에 눈치를 보고 있는데, 나보고 상무님 바로 근처에 앉으라고 해서 - 나름 윗사람이 앉을법한 자리에 - 착석하는 데에 7초가 넘게 걸릴 정도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앉았다.


‘뭔가 술을 버린다거나 하기에는 전혀 사각지역이 아니다. 영락없이 죽었다. ’

나는 오늘 병원에 실려갈 것인가, 오늘의 끝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아.. 걱정이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잡채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요 방금 떠난 막차다. 이제 그냥 전사하는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단단히 먹자.


약간의 식사를 한 후에, 드디어 차례가 온다. 간담회 간사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나에게 신입사원으로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한다. 참고로 간담회 간사는 대리 말년, 과장 초년 정도에 있는 사람이 하게 되는데, 그 정도가 회사생활 적당히는 했고 동료들도 거의 다 알겠다 싶었는지, 간사를 맡아서 간담회나 회식에서의 사회 등을 보곤 했다.


근데 간사를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수줍고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은 그 역할을 시키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름 에이스들이 그 간사 역할을 하였고, 힘들어도 그런 역할은 부문 전체에서 나름 노출이 큰 사람으로 인식되어 좋은 평판을 갖곤 했다. 그날도 대리 중간 정도 되었던 사람 같은데, 딱 봐도 위에서 좋아하게 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바로 이 선배가 이직을 해서 지금은 아주아주 큰 회사의 40대 사장님이 되셨다.)


‘자. 해보자.’

일어나서 정갈한 말을 씩씩하게 해 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기획부문에 입사한 최한결입니다. 많이 부족한데, 기획에 오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진짜 열심히 해서 선배님들이 잘 뽑았다 생각하는 그런 열정 있는 후배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도 크고 좋았고, 멘트도 나름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데, 반응은 사우나의 냉탕보다 차갑다.

"에이~ 자기소개를 누가 그렇게 해."

"신입사원 패기가 너무 약하네."

"IR 뭐 하는 거야, 제대로 안 가르친 거야."


‘쉽지 않군. 젠장’ 이라는 생각에 검은 얼굴의 우리 팀장님을 봤더니, 표정이 썩 좋지는 않다. 나름의 여유를 가지고 살짝 미소를 주는 듯 하신데, 그렇게 맘에 드는 상황의 얼굴은 절대 아님이 느껴진다.


차가운 반응에 어쩔 줄 몰라서 쭈빗대는 신입사원. 뭔가 애처롭게 쳐다보는 간사 선배와의 미묘한 속상함과 위로가 서로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찰나, 드디어 상무님이 말씀하신다.


"야, 손석준. 니가 사수지?“

“네, 상무님.“

“니가 한번 시범을 보여봐."

아 이런 군대 문화라니.. 내가 못한다고 바로 막고참에게 피해가 가는 문화. 아. 젠장.


"아,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아 뭐야. 바로 또 일어나면서 뭔가를 진짜 하려고 하네. 아 진짜 나만 패기 없고 얼치기 같은 신입사원이 되는 건가.‘


"선배님들, 저희 팀 신입사원을 잘 봐달라는 의미에서 제가 한번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래, 손주임. 니가 한번 해봐. 너는 잘하잖아.“

"오~~ 좋아. 해봐 해봐.“

"넵!"

그러면서 무대 가운데로 나간다. 무대라 함은 두줄로 되어 있는 테이블의 가운데로 온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람이 미쳤다.


"안녕하십니까, 1등 ㅇㅇ, 최강 기획 , 무적 IR , 일 잘하고 예의 바른 제 이름은 손! 석! 준! 이렇게 선배님들께 인. 사. 드립니다. "

몸이 좌로 갔다가 우로 갔다가, 마지막에는 점프하면서 착지까지 한다.

‘뭐야 이거. 이거 대학교 신입생이나 하는 FM 아닌가. 갑자기 FM으로 소개를 한다고? 손주임님이 고대 나왔나?’


“와~~ 짝짝짝. 손석준.! 손석준.!”

"역시 응원단 달라."

‘뭐야 고대 응원단 출신이야?’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대 출신은 맞지만 하계수련회 응원단 출신이었을 뿐.


상무님이 말씀하신다.

"그렇지! 손석준. 그래. 좋아. 신입사원 잘 봤어?"

놀란 - 정말 여기 문화는 별로다 라는 생각에 놀라버렸다 - 눈으로, 그러나 그 놀람을 최대한 감추며,

“네, 잘 봤습니다.”


"다시 해봐."

‘아. 진짜 다시 시킨다고요? 와 이거 진짜 군대네.’

‘저도 호락호락 샤이보이가 아닙니다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흥!’

하면서, 재빠르게 머릿 속으로 말할 것을 스케치한다. ‘당차게.. 다시 한번.. 신입이다..’

“네, 알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1등 OO, 최강 기획, 음.. 음.. 최고 IR , 내가 바로 신입이다. 제 이름은 최한결. 제 이름 다시 한번 최. 한. 결.! 당차게 인.사. 드립니다 ! 음.. 음..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오~~. 좋아. 잘한다.” 짝짝짝.!

‘아 여기 뭐냐. 이 군대 문화 뭐야. 역시 ㅇㅇ 인가.’

‘자괴감이 든다. 잘못 왔나 보다.’


이렇게 신입사원 소개를 마칠 수는 있었지만, 나에게 IR 부서의 매력을 떠나 회사 문화에 대한 짜증이 아직 불지 않은 풍선처럼 자리하기 시작했다. 풍선이 점점 커져서 결국 터지는 데까지 7년이 걸리긴 했지만, 확실한 건 이때 내 마음에 풍선이 들어왔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렇게 신입사원에게 뭘 강요하는 문화는 거의 내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3년 후에 IR팀에 신입사원이 하나 오게 되었는데, 꼭 여자여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세월이 3년이 흘러서  그런지 또는 시대가 조금 변해서 그런지 이런 군대 스타일의 자기소개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나는 했는데 애들은 왜 안 해.’ 이런 생각을 1도 안 했다. 나는 부득이하게 했지만 마음속에서 엄청난 거부반응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런 걸 절대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실 상당히 - 남의 눈에는 ’상당히‘가 아닌 ‘완전히’ 이겠지만 - 꼰대에 가깝다. 그러나, 그 당시에 느꼈던 수많은 일들이 정말 꼰대 문화의 정석이었기 때문에, 그걸 나는 받아들이긴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짜증을 많이 냈기 때문에, 초심을 기억하면서 그런 걸 어린 친구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술을 못 하는 것처럼 - 특히 내가 술을 못하기 때문에 술은 한잔도 강권하지 않았다 - 술을 포함해서 사람마다 못하는 게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일을 제외한 비업무적인 것을 잘 못한다고 하여 그것을 강요하거나 유도하는 것은 인격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잘하는 것은 매우 칭찬하고 못하는 것은 배려하는 문화를 소망한다.






(사진출처 : 너무 재밌는 ‘미미미누’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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