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 슬리퍼 신는 게 이렇게 신날 일이야?
부서에 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났나. 선배들의 슬리퍼를 보면서 나도 슬리퍼를 신으면 좋겠다 싶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오듯이 슬리퍼는 사무직들의 전투화 아닌가. 그래서 나도 슬리퍼를 신고 싶었는데 나에게는 그 자유가 있지 않았다.
기억이 사실 가물가물한데, 위에 강대리님께 얼핏 물어봤다.
"강대리님, 혹시 슬리퍼.. 저도 신어도 되나요?"
"음.. 1년 정도는 참아."
"아, 넵."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는 건데,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래 신입사원이 무슨 건방지게 슬리퍼야.’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구두가 불편해 보였으면 강대리님이 아닌 다른 선배들이라도 나에게 "야, 그냥 슬리퍼 신어" 라고 했을 법도 한데, 아무도 나에게 슬리퍼 신으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사무실 자리에서조차 구두 신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사실 신입사원이지만 할게 많았다. 업무적으로 배울 것도 많았고 교육으로 자리를 많이 비우기도 했고, 그래서 슬리퍼 없이 지내는 시절은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슬리퍼를 못 신게 했다고 해서 크게 화가 나지도 않았다.
1년이 딱 되는 날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심 입사 1주년 정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1년이나 됐다는 기념도 되지만 머릿속에서 그래도 선배들처럼 슬리퍼를 신으면 편하겠다 라는 생각도 있었고, 슬리퍼 없이 항상 구두만 신고 다니는 나 자신이 '저는 아직 신입사원입니다.' 라고 표시하고 다니는 듯하여 슬리퍼라는 매개체(?)를 통해 '저 이제 신입사원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중간에 그룹에서 하는 수련회를 가기 위해 2달 정도 자리를 비우기도 했지만, 여하튼 1년 정도가 지났었다. 1년이 딱 되는 날은 아니었지만, 얼추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부서의 선배들과 점심을 먹고 지하에서 과일주스를 먹으면서 얘기를 하던 중에 내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래도 제 어색함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니,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대리님, 이제 슬리퍼 신어도 될까요?"
"어? 그러네. 아직도 슬리퍼 안 신고 다니는구나."
다른 과장님이 말한다.
"야, 빨리 신어. 진작 신어도 됐어."
'뭐야. 진작 됐으면 진작 알려주지. 그러나 원망할 틈도 없이 기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도 이제 슬리퍼를 신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건가. 좋아! 슬리퍼 이제 신자!'
"감사합니다!"
그렇게 바로 선배들에게 얘기하고, 오후 일과 중에 적절한 시간에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마침 문구를 사야 할 것이 있었고, 문구점은 길 건너 시장통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로 가는 김에, 나는 시장에서 실내화 하나를 사기로 했다. 그때 시장통으로 걸어가는 길에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는데, 집사람이 아직도 가끔 얘기한다.
"예슬아. 나 드디어 슬리퍼 사러 간다!"
그 말투와 느낌이 정말 신나 보였다고. 회사 다니면서 그 정도로 기뻐하면서 전화한 일이 거의 없었다고. 지금 생각해도 맞는 말이다. 그때는 진짜 무지하게 신났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장에서 튼튼해 보이는 슬리퍼를 사고 시장의 검은 봉투에 넣어서 사무실까지 갖고 왔다. 마치 조단 일레븐 박스를 뜯는 것처럼, 나에게는 그 검은 봉투가 나이키 럭키드로우보다 더 좋은 것이었다.
'이거야. 아주 좋아!'
그렇게 나도 슬리퍼를 신게 되었다. 그렇게 구두를 슬리퍼로 갈아 신으면서, 이제 근무시간 동안 주인을 잃은 그 구두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묵념했다.
잘 가라. 신입사원 꼬리표.
나에게 슬리퍼는 단순히 편함의 의미가 아니었다. 1년을 기다려서 나도 이제 신입사원 티를 벗어내는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신입사원이 아니다. 나도 어엿한, 더 이상 이 팀이 어색하지 않은, 제대로 된 일원이다. 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 생각하면, 신입사원들이 첫날부터 슬리퍼를 신을 텐데, 그리고 아무도 그것 가지고 뭐라 하지 않을 텐데. 그때는 진짜 달랐다. 아니면 그 회사가 그 부서가 유독 달랐다. 진짜 유치했지만, 너무 어이없는 에피소드였지만, 너무나 생생한 그날의 검은 봉투가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의 신입사원들에게 신입사원 꼬리표는 무엇일까. 어떤 걸 안 하게 되면, 또는 어떤 걸 하게 되면 '아 나도 이제 신입사원에서 벗어나서 이런 걸 하는구나 / 안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까.
회사 로고가 처음에는 자랑스럽다가도 언제부터인가 부끄러워질 수도 있는 순간일까. 사원증을 더 이상 목에 거는 일은 거추장스럽다고 느끼는 때부터일까. 회사 지각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인데 이제 몇 분 정도 늦는 것은 여유가 생겨지는 시기부터일까.
여러분들은 언제부터 <신입사원> 이라는 이름에서 진정으로 벗어나게 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