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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우구스티노 Mar 14. 2023

퇴사는 도망이 아니라 OO이었다

21 │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퇴사를 결심(바로 이전 글 '월급루팡 선배에게.. 라고 물었다' 에서 퇴사를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를 언급했습니다) 하고 나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보이던 것들이 안 보이게 되었다.


1) 매우 보수적이며 경직된 문화 2) 성과만 잘 내면 된다는 분위기 3) 그 성과를 위한 지나친 야근의 연속 4)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비효율적 의전

위와 같은 단점들은 사실 안 보고 싶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쉽게 보이는 것들이어서, 애써 외면하고자 눈을 감아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던 부서를 회사는 가치 없다고 여기면서 계속해서 인원을 줄여버렸고, 그런 상황에 으쌰으쌰 함께 헤쳐나갈 선배 한 명만 있어도 좋으련만.. 현실은 루팡만 있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기껏 외면하고 있던 부정적인 부분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또렷하게 포착되기 시작했다.


사실, 매우 많은 걸 배우게 해 줘서 고마운 회사였다. 그룹 동기에 계열사 동기까지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들과 이제 같은 소속감이 아니라면 아쉬울 것 같았다. 좋은 선배들도 많았고, 좋은 얘기도 많이 들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부문 내에서 다음이 기대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좋은 부서에서 여기저기 화려한 출장도 많이 다녀보고, 송년회와 야유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도 주는 회사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잘 보이던 것들이 점점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유망한 미래는 도망가고 싶은 미래가 되었다.


그렇게.. 시야에 반전이 일어나면서 나는 퇴사에 대한 결심을,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뿌리를 뻗어 내리고 있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나름 오랫동안 고민했는데요, 저는 그만 퇴사하겠습니다."


착한 팀장님이었지만, ‘가는 사람 안 말리고 오는 사람 안 막는다’ 라는 철학의 소유자였기에 군말 없이 보내주려고 하셨다. 그렇게 쿨하게 보내주려는 것에 대해, 나는 섭섭함이 전혀 없었다. 그저 팀에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서 팀장님께 죄송할 뿐이었다.


상무님은 조금 달랐다.

‘휴가 쓰면서 일주일만 더 생각해 봐라.’

‘1~2년만 있으면 회사의 달콤한 프로그램(해외주재원 후보자 같은)이 너 차례로 돌아올 것이다.’

‘왜 섣불리 결정하냐. 너무 홧김에 결정하는 거 아니냐.‘ 와 같은 질문이 하셨고 회유책을 제시하셨다.


'나 같은 대리 나부랭이가 뭐가 아쉽다고 붙잡아주십니까.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상무님, 죄송합니다. 나가서 더 잘하겠습니다."


그렇게 직속상관들에게는 퇴사 통보 및 승낙을 구했다. 퇴사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반이었고, 2주가량의 휴가 소진 기간을 제외하면 인수인계 기간은 한 달 남았다. 그 한 달 동안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인수인계를 잘하려고 노력했고, 부서에서 부문에서 동기들과 그리고 주니어 후배들과.. 등등의 환송회를 거쳤다.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만큼은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환송회 자리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환송회를 미처 하지 못하는 여러 팀들에게는 따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인사할 때 좋은 말 해주시는 분은 20% 정도에 불과하고, 남은 80%는 왜 나가냐. 회사 거기서 거기다. 아니 왜 기획에서 잘 되고 있는데 나가려고 하냐 등등의 부정적인 얘기들이 많았다.


다른 부문이지만 친하게 지내던 팀의 팀장님은

"최대리,

내가 말야.. 그 동안 OO 나가서 잘 됐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먼저 나간 노대리, 이과장, 김대리 모두 다 나가서 그저 그런 거 몰라? 최대리도 후회할 거야. 아니 왜 OO을 나간다 그래?.."

'안 보이던 것들이 자꾸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게 보이니까 다니기가 좀 힘들어요..' 라는 말은 못 하고,

"아, 네. 팀장님. 죄송합니다. 후회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그동안 잘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한편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신 20%의 선배들도 기억이 난다. 떠나는 이유를 특별히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나와 같은 것들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충분히 공감해 주는 선배들이 있었다. 자신들은 용기가 없어서 남아 있을 뿐, 마음은 너랑 같다는 눈빛을 보내주던 선배들이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선배 중의 하나인 김경준 차장님께는 그동안 잘해주셔서 고맙다는 마음과,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는 마음이 함께 들었다.


"차장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먼저 그만둬서.. 그래도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괜찮아. 니 맘 왜 모르겠냐. 최대리는 잘하니까 어디서든 좋아할 거야."

"차장님, 감사합니다. 저도 여기 네트웍 다 끊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게 많네요.."

"한결아.


네트웍이 왜 끊겨. 니가 나가서도 나랑
연락을 하면 니가 새로 만든 네트웍이
나에게도 새로 생기는 거지.
너는 여기 네트웍 그대로 있고,
새로운 네트웍 만들 수 있는 거고
그러면 너나 나나 네트웍이 끊기는 게
아니고 더 확장되는 거야..


"아, 네.. 차장님. 알겠습니다. 나가서도 잘하고 자주 연락드릴게요."


또 다른, 내가 좋아하던 IR에 예전에 같이 있었고 나에게 항상 잘해주던 선배는,

"한결아, 축하한다. 니가 먼저 가는구나."

"아, 네. 과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죄송해. 잘 나가는 거야. 너는 더 다른 세상도 경험해 봐."

"못 버티고, 먼저 도망가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한결아.


도망가는 게 아니고,
도전하러 가는 거야


"아, 네. 도전..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도전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




그렇게, 좋은 말과 나쁜 말을 들어가며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기획부문에서 5년 이상 일하고 팀을 옮기거나 퇴사를 하면 기념패를 증정했는데, 7년간의 기획부문에서의 생활을 마쳤더니 내 손에는 부문원 전체의 이름이 모두 들어간 재직기념패를 받게 되었다.


[ 在職記念牌 ]

지난 7년간 기획인으로 재직하며 한결같은 열정과 모범적 성실함으로 회사와 부서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함께했던 시간들은 가슴속에 간직하며 어느 곳에서나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획부문원 모두 기원합니다.


마지막날, 인사드리는 순간마저 다들 바빠서 '그래, 한 달 동안 인사 많이 했으니까.. 이제 정말 가라~' 라는 느낌이 들었다. 임직원수가 만명도 넘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겠는가. 나같은 대리 나부랭이의 퇴사는 처음 통보했을 때에만 '어? 그럼 일을 누가 하지?' 라는 생각을 할 뿐, 한 달 동안 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방안들을 찾은 후(그리 어렵지도 않게 방안들은 찾을 수 있다. 조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에는 '그래. 이제 그만 가라.' 라는 분위기가 된다.


나의 보잘것없는 존재감에 대해 여실히 깨닫는 마지막날이지만, 그래도 고맙고 고마운 회사였다.

처음에 받고 기분 좋았던 내 얼굴이 박힌 사원증을 총무팀에 반납하고, 정중하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꾸벅 드리고 나왔다. 정문을 나서는데, 이제 사원증도 없어서 다시 들어갈 수 없는 회사라고 생각하니 쇼핑백을 들고 있는 한 손이 왠지 떨리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정말 너무 많이 배우고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서 감사했던 첫 회사를 퇴사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보고 싶지 않던, 애써 눈을 감아버렸던 싫은 부분들이 자꾸 보여서 '여기서는 더 이상은 싫다.' 라는 생각으로 「도망」 가는 건 줄 알았는데,「도전」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래.. 도망 아니라 도전.'

'자, 새롭게 도전해 보자.!'




이 첫 도전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는 다음 글에 쓸 예정이다. 그러나, 그 도전이 성공이었던 실패였던 결국 미래를 위한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물론, 퇴사와 이직 과정에서 배운 게 매우 많아서 감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그래서 ‘퇴사는 비추, 그러나 … 세가지에 해당하면 강추​’​ 라는 글에서 1차적인 생각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떠올려지는 이야기가 바로 ‘connecting dot’ 이다. 스티브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연설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말한 세 가지 스토리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이 바로 ’connecting dot‘ 이다.


미래를 보고 점들을 연결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10년 후 되돌아보니 그것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과거로 되돌아보았을 때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점들이 당신의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스티브잡스-


우리의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선택한 점들의 연속이 결국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가 될 것이다. 선택의 결과에는 희열도 있고 후회도 있다. 그 어떤 쪽이던 배우는 게 있고, 미래를 위한 경험과 자양분이 될 것이다.


“connecting dot - 연결되는 점”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한다. 그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모든 선택에는 의미가 있다. 이왕이면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취하고 엄청난 고민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혹여 과거의 어떤 선택이 지금 이 순간 후회로 남더라도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긍정적으로 믿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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