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썸머 Aug 19. 2023

이별은 싫다고 했다

회피형 남편의 이혼 거부

우리 부부가 이별이나 이혼을 고민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사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그런 일이 몇 번 밖에 일어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무언가 고민을 하면 굉장히 오래하는 편이어서 인 것 같다. 미련이 많은 성격이다. 앞선 이별과 이혼 고민은 '어떻게 하면 맞춰서 잘 살수 있을까'에 미련을 두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2차 대첩에서는 '이혼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에 포커스를 맞추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한 번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쉽게 결정을 못하고 미련을 두고 끙끙 앓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몇 번 안되는 것 뿐이지, 나는 우리의 관계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늘 찾아 헤맸다.


서로 뼈를 깎는 노력을 했지만 우리 둘의 간극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나에게 그는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가족을 돌보지 않았고

그에게 나는 너무나도 감정적이고 요구가 많고, 의존적이었다.


나는 끝없는 평행선 같은 관계를 종료하기로 마침내 결심했다.



우리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조금 외로웠지만 건너편을 바라보면 항상 그가 있었다. 그는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내게도 빨리 걸으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피해가 될까봐 숨을 헐떡이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 우리.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 길이 점점 좁아진다고 느낄 때면 언제나 그는 자기중심적인 선택을 하거나 힘든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길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목이 마르고 태양이 뜨거웠다. 남편은 92km만 더 걸어가면 오아시스가 있을 수도 있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내게 필요한 사람은 물 한 모금을 나눠마시고 그늘에서 서로의 다리를 주물러줄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필요한 사람은 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할 사람이었다.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그 거리를 유지하며 분주한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나는 지쳤다. 이제 무미건조한 이 길을 그만 걷기로 했다.


당신도 이제 훨훨 날아가. 나와 함께 보조 맞추고 사느라 고생 많았어.


나는 나 자신과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그의 분주한 두 다리에 부스터가 되어주기는 커녕 모래주머니처럼 발목잡는 내가 사라지면 그도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이혼하기 싫다고 했다.


늘 길 건너편에 있는 그는 쉽사리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지만 더 멀어지지도 않았다. 또한 홀로 남는 것도 거부했다. 그 자리에서 나와 함께 하기를 고집했다.


평생 나로 인해 괴롭고 갈굼 당하고 혼만 났지만 그는 결혼을 해서 좋다고 말했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성공한 회피형인 그는 사회생활을 하는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사적으로 누군가와 연락하거나 주기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거나 자발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회피형들은 그런 곳에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늘 혼자 다닐 수는 없는 노릇.


결혼을 통해 늘 여행할 수 있는 메이트가 생겼고, 대화 상대가 생겼고, 이런저런 일을 의논할 수 있는 대상이 생겨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혼할 수 없는 여러 이유를 들었고, 별로 신뢰가지 않는 약속들을 했다.




결국, 이혼은 보류되었다. 남편의 설득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특정 시기까지만 함께 하고 이혼하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생겼다. 우리 둘이 함께 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야말로 흩어지면 죽고 뭉쳐야 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이 위기의 시간만 지나보자. 곧 해결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이혼하면 안볼 사이라고 생각한 나는 시부모님과의 연락까지 거부할 정도로 꽤 오랫동안 이혼에 대한 마음이 확고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남편은 변하겠다는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다. 애초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변화가 문득문득 놀랍게 느껴지곤 했다.


외식을 할 때면 나와 아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먹었고, 본인이 먹고 싶은 메뉴는 거의 주장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본인이 먹고 싶은 메뉴만 먹었다.)
주말이면 내가 집에서 쉬는 동안. 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애니메이션을 봤다. (그 전에는 본인이 보고 싶은 영화만 봤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안방에 누워있고,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놀아주고 목욕을 시켰다. (그 전에는 남편이 안방에서 일이나 공부를 했고,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쇼핑에 참견하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에 저장된 내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의 핸드폰에 저장된 내 이름은 '이현주'였다.


어느 날, 밖에서 내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동료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왜 놀랐냐고 물어보니 "와이프와 통화한거죠? 제 와이프 이름은 김현주인데, 이름이 같다니 너무 놀래서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재미있다며 집에 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주라는 이름이 얼마나 흔한데. 이름이 같아서 놀란 건 당신이 민망할까봐 임기응변으로 말한거야.


놀란 진짜 이유는 본인 와이프 이름을 '이현주'라고 저장한 데에서 놀랐겠지."


그는 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회피형들은 가까운 친구나 가족을 사무적으로 대한다.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이력서나 대통령 후보 약력에나 등장할 법한 이력을 읊는다. 본인의 부모나 동생에 대해서도 '00에서 태어나 00대학을 졸업하고 00기업에 근무 중이다'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사실 그의 스타일을 알고 있어 당사자인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다만, 동료가 왜 놀랐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남편은 엄청 민망해하면서 휴대폰에 저장된 내 이름을 바꿨다.


'내사랑(하트)'이라나 뭐라나.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1-2년의 시간 동안 해결된 문제도 있었고,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남편의 역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많았다.


숨은 아이 찾기 ^^


그 중 하나는 아이었다.


호기롭게 혼자 아이를 키우겠다고 했다.

의지할 친정 부모도 없는 내가

그런 각오까지 했을 정도로 절박했다.


문제는 아이가 혼자 키울 수 있는 성향이 이니었다.

흔히 말하는 "고집이 쎄고 자기주관이 뚜렷한 아이"였고,

1초의 자극없는 상황과 1초의 기다림도 견디지 못했다.


물마실 틈도 주지 않고 마른 낙엽처럼 달라붙어

징징거리는 터에 베이비시터분들은

일찍 도망가거나 그 이후로 연락이 안되는건 다반사.


"나는 요양보호사하려고"

"저는 공부를 하려구요"


여러 시터분들의 진로를 확실하게 정해준 아이였다.


감정에 동요되고 육아효능감이 떨어지고

아이가 징징거리는 환청에 시달렸던 나.


하지만 남편은 아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육아서에서 나오는대로 감정을 빼고 단호하게

교정해야할 행동과 말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보상을 주며 아이를 이끌었다.


아이는 물이 마시고 싶으면 소리를 쳤다.

"물! 물! 물!"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뜨고 가져다 주는 몇 십초 동안도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최대한 빨리 물을 가져다주거나 결국 나도 버럭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남편은 이런 방법을 썼다.

편 : '물 주세요' 라고 해.

아이 : (저항하다가 결국) 물 주세요.


남편과 이이는 비슷한 성향이 많았고

그는 아이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가 응가를 할 때마다  유튜브 보는 시간을 주었고

그림책을 읽을 때마다 보상을 줬다.


우리는 육아부터 재테크까지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몸이 되어버렸고

빠른 독립을 위해 문제들을 해결하다가

나는 그가 가진 장점과 한결같은 태도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전 05화 회피형 남편과의 2차 대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