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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Oct 10. 2024

결혼은 하고 싶지만 연애는 두려워

남모르는 상처

"으응. 잘 지내고 계셔. 이번에 민박집 오픈하면서 샬롯 돌잔치 이후 처음으로 엄마를 만났었는데. 이모랑 같이 와서 파리 시내 구경도 하시고, 샬롯 큰 것도 보시고... 정말 즐겁게 시간 보내다 가셨어."


"나한테 얘기를 하지 그랬어. 한 달 전에만 말해주면 내가 할인 티켓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줄텐데."


"엄마랑 이모는 무리셔. 공항에서 괜히 되돌오시면 어른들이 고생이시기도 하고. 또 말도 안통하니 한국 항공사를 이용하셔야했거든. 두 분이 해외에서 환승하실 수도 없을테고."


미주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제 남동생이 어쨌든 대학은 졸업해서 용돈벌이는 하니까 경제적으로도 조금 여유있으신 것 같아."


"너무 잘 됐다. 언니도 샬롯 다 키웠고, 여기서 사업도 시작하고 했으니 이제 마음 편하게 지내시면 되지."


재경은 안심한 듯 아예 김치찌개 그릇에 밥 한공기를 통째로 말며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미주는 그런 미주 가까이에 잡채와 무말랭이 접시를 밀어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미주는 재경에게 기자가 여동생 기숙의 몫까지 비행기표를 끊으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한 일이나, 한국으로 돌아간 후, 만나는 친척들마다 '딸 둔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서서 죽는다'며 파리에서 고생만 하고 왔다며 앓는 소리만 했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모처럼 만난 재경과 엄마의 이야기를 하며 허비하는 것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너는 잘 지내고 있지?"


"어휴. 내 얘기를 하려면 목이 메이니까 밥 다 먹고 하자구."


"그래. 아직 시간 많으니까 밀린 이야기는 천천히 풀어나가자고."





다 먹은 그릇을 치운 식탁 위에는 달콤한 향을 풍기는 믹스 커피와 진경이 카타르에서 사온 대추 야자와 초콜릿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이 초콜릿 구한다고 고생 좀 했지. 두바이 초콜릿은 아니고 카타르 초콜릿이긴 하지만 피스타치오 맛도 있고 피칸 맛도 있고 아무튼 종류별로 다 사왔어."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샬롯 주려고 사왔지 뭐. 민박집 손님들도 하나씩은 드릴 수 있겠다."


"아휴. 손님들 간식까지. 고맙다, 얘. 늘 너한테 도움만 받는 것 같아."


"이런 간식가지고 도움이라니."


"내가 결혼했을 때, 커플 잠옷 사들과 와서 축하해주고. 샬롯 낳았을 때도 내 화장품 잔뜩 사들고 왔었잖아. 아기만큼이나 엄마가 더 소중하다고 말이야."


"하하. 내가 그랬나?"


"타지에서 결혼하고 애 낳는다고 친구들과 연락도 많이 끊기고 했었는데. 큰 일 있을 때마다 꼭 찾아와주는 네가 얼마나 고마웠는데."


미주는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한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그때는 네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나는 샬롯 때문에 꿈도 포기하고 이렇게 낯선 나라에 묶여 있는데, 너는 승무원이라는 꿈을 이뤄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잖아.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아휴, 난 언니가 부럽네. 그런 소리 말아!"


재경은 그런 미주에게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속 호주에 있으면서 면접을 본다고 한들 합격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잖아. 샬롯은 내 꿈을 꺾은 게 아니라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주었던 것 같아.


"나야 외노자 신분 아니야. 일이 너무 재밌다보니 열심히 일했고 승진까지 잘 해왔지만 이렇게 평생 살 수는 없잖아. 같이 일하던 동료들은 어느새 이직을 하거나 결혼을 해서 하나둘 떠났고. 곧 삼십대 중반인데 언제 결혼이나 할런지.


언니는 딱 좋을 때 결혼해서 아이 키우고, 이제는 자리잡고 살면서 언니가 하고 싶다던 민박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잖아. 나는 도대체 언제 그 과정을 다 밟을까 싶어 막막해."


"결혼 생각이 있구나. 승객 중에 괜찮은 사람은 없었고?


"승객? 뭐 영화라도 찍을까? 큭큭. 그저 일만 하지 뭐."


"아직... 그 사람을 못 잊은 건 아니지?"


결혼하고 싶다면서도 벌써 3년 째 연애를 하지 않는 재경이 걱정스러웠던 미주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사실 재경은 재작년까지 진한 연애를 했었다. 상대는 카타르에서 2년 정도 주재원으로 발령받았던 4살 연상 회계사였다. 두 사람은 카타르라는 나라에서 일하는 한국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시끌벅적한 클럽보다는 맛집을 찾아다니며 여가를 즐기는 취향까지 비슷해 급속도로 친해졌다.


지방의 한 전문대학을 졸업한 재경은 소위 말하는 SKY 대학을 나와 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연인의 스펙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겸손하면서도 똑부러지는 그의 모습이 무척 좋았었다. 재경의 연인은 비행을 마치고 카타르로 돌아온 재경을 데리러 가기 위해 도하 공항까지 종종 마중을 나왔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외로운 타지 생활을 보냈다. 그렇게 2년 간의 발령 기간이 끝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도하 공항에서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 내가 한국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게. 지금처럼 자주는 못만나겠지만 한국으로 비행올 때마다 만나면 되잖아.


- 응. 오빠.


그렇게 도하에서 두 사람은 헤어졌고, 재경은 지옥이라고 불리는 카트만두로의 퀵턴(Quick Turn, 목적지까지 비행 후, 바로 다음 비행으로 돌아오는 것) 비행을 다녀왔다. 카트만두까지 5시간 비행 후, 1시간 동안 다음 비행을 준비하고, 다시 5시간 동안 쉼없이 카타르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새 무척 피곤했던 재경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 벌써 몇 시지? 오빠한테 연락 왔을 텐데 걱정했겠다. 얼른 연락해줘야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일어난 재경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 부터 찾았다. 연락이 닿지 않아 혹시라도 걱정할까봐 싶어서였다.


- 어, 왜 연락이 없었지?


하지만 재경의 핸드폰에 있는 메시지는 같은 승무원 아파트에 살고 있는 후배가 보낸 것이었고, 부재중 전화는 한국의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었다. 분명 인천공항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연락이 없는 것이 이상했던 재경은 메시지를 남겼다.


[오빠, 아직 인천에 도착 안했어? 연착되었나? 나는 카트만두 다녀와서 이제 숙소에서 한숨 자고 일어났어.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줘~]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남자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보이지 않고, 숫자 1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재경은 그제야 자신이 차단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친구는 한국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잠수를 탄 것이었다.


재경은 그 후로 이렇다할 연애를 하지 않았고, 일에 더 열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쉬는 날에는 일부러 직원용 할인 티켓으로 외국에 흩어져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혼자 도하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너무 우울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 다녀옴.

카타르에서 모래바람 맞으며 함께 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한국으로 돌아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다니 세월 참 빠름.

신부가 고등학교 선생님이어서 반 아이들이 축가해주네~ 너무 귀엽다.]


그렇게 1년 정도 흘른 어느 날, 오랫만에 들어가본 SNS에서 재경은 전 남자친구의 직장동료가 새로 올린 피드를 보게 되었다.


- 카타르에서 같이 일한 사람의 결혼이라니... 설마...


화려한 호텔 로비와 붐비는 사람들, 웅장한 버진 로드 위로 행진하는 신부의 뒷모습, 그리고 코스요리로 나온 스테이크와 샤베트 등의 사진을 넘기니 흐릿한 신랑의 옆모습 사진이 한 장 나왔다. 비록 흐릿한 사진 하나 뿐이었지만 2년 동안 매일 같이 보아온 전 남자친구의 얼굴을 진경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미 헤어진지 1년이 더 지났고, 많이 무던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전 남자친구가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진경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흘렀다. 영문도 모른채 맞이한 이별이었다. 단지 장거리 연애가 싫어서 헤어진 것인지 진경이 싫어진 것인지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혹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을 알려준다면 바꾸도록 노력해보겠다고 애원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진경이를 차단해버렸다.


결혼 소식을 듣고 난 다음에야 진경은 왜 그가 자신에게 더이상 연락을 하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결혼 상대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와의 이별은 언제가 되었든 올 수 밖에 없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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