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시일반으로 준비하면?
너무 쓰지도 않지만 너무 옅지도 않게, 너무 뜨겁지도 않지만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맛있게 우려진 홍차를 한 잔씩 마셨다. 씁쓸한 홍차에 곁들이기 좋은 달콤한 대추야자와 초콜릿까지 더해지니 밤을 새고 기차에서 쪽잠을 잔 수환이나 7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바로 민박집으로 놀러온 재경이나 모두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언니, 찻잔도 너무 예쁘다."
재경이 금장이 둘러진 꽃무늬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재경의 말처럼 찻잔은 오래되어 금장이 조금 닳기는 했지만 섬세하게 그림이 그려져있었고 관리가 꽤 잘되어 있었다.
"파리에 처음 왔을 때부터 앤티크 샵을 엄청 자주 다녔었잖아. 물론, 아기가 태어나면서 차를 마실 시간도 없을 뿐더러, 이렇게 차려놓을 정신도 없었지. 더군다나 깨질까봐 걱정도 되서 찬장에 오랫동안 모셔만 두었던 티세트야. 민박집에 장식도 해놓을 겸, 한가할 때 마실까하고 아예 여기에 갔다둔거야. 무려 100년이나 되었다고 하더라고 하던데, 잘 산거 같지?"
"응. 마치 프랑스 할머니가 물려주신 것 같아."
"맞아요. 여기가 한인 민박집이라고 하지만 민박집 내에 걸려있는 그림, 장식장에 있는 찻잔, 캐비넷 위에 덮여있는 천들이 파리에 와있는 느낌을 확 주더라구요."
"어머, 소라씨.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다 제가 앤티크 샵에서 하나씩 사모은거라서 애착이 크거든요.
그나저나 수환씨는 대추야자가 입맛에 맞으시나봐요. 재경아, 좀 더 꺼내줄래?"
미주는 비어있는 찻잔에 차를 부어주며 손님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모두들 즐겁게 차마시는 시간을 즐기는 눈치였다.
"사실 대추야자는 처음 먹어봐요. 엄청 맛있네요. 설탕에 절인건가요?"
수환은 대추야자를 접시에 더 덜어내는 재경에게 궁금했는지 질문을 했다.
"설탕에 절인 것 같죠? 과일 자체가 그렇게 달아요."
"건강한 간식이네요."
"뭐, 과자보다는 영양적인 면에서 더 나을 수 있겠지만요. 이거 살 엄청 쪄요. 중동 사람들 중에 비만이 많은데, 다 대추야자 먹고 살쪘다는 소문도 있답니다."
"중동 사람들한테는 거의 무슨... 음... 떡같은 존재랄까요? 간식도 되고, 식사 대용도 되고, 차랑도 마시고, 여행 갈 때도 먹고요."
"어휴, 먹어야겠어요. 동생분은 중동에서 여기까지 놀러오신 거예요?"
그만 먹어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어느 새 대추 야자를 하나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수환은 재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언니는 아이랑 가정이 있지만 저는 스케줄도 자유롭고, 비행기타는 것도 편하니 제가 와요."
"아... 승무원이세요?"
"9년 째, 카타르 항공에서 일해요. 사막 한 가운데서 할 일도 없고.. 일년에 최소 두 번은 언니네 놀러오는 것 같아요. 혼자 타지 생활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심심하거든요.
그나저나 파리에 처음이시면 관광을 하셔야하는데, 민박집에서 이렇게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셔서 어떡해요?"
재경은 파리에 처음 온 관광객인 수환이 민박집 김치찌개를 첫 끼니로 먹고, 가장 많은 시간을 민박집에서 보낸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더군다나 진규에게 들은바로는 내일 로마로 떠난다고 했던데 말이다.
"오늘 관광은 민박집 사장님께서 진행하시는 야경투어만 하려구요. 그리고 내일 야간열차를 타기 전에 잠깐 낮에 베르사유 궁전 갔다올 생각입니다. 런던에서 파리는 그래도 가까워서 박사 졸업하기 전까지 또 오지 않겠어요? 진규형도 있으니 명절에 오던지요. 하하."
"아, 영국에서 오셨다고 하셔서 유럽 여행중이신 줄 알았어요. 유럽에서 공부하시나봐요."
"네. 진규형이 박사생으로 있던 연구실에 저는 석사생으로 있었어요. 저는 영국에서 지금 박사 중인데, 진규형이 이번에 파리로 포닥을 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형 만나려고 여행 일정까지 바꿔가며 온 거예요."
"진짜 같은 연구실에 있었을 때는 맨날 밤새면서 붙어있었는데 말이다."
어느새 설거지를 다 끝내고와서 대추야자를 세네개 집어들어 거실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진규가 말했고, 나란히 옆에 있던 소라까지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에 말을 보탰다.
"큭큭. 맞아. 완전 여자친구였던 나보다 더 끈끈한 사이였지."
영국과 파리의 거리는 한국으로 치면 서울과 부산만큼의 먼 거리지만 타지 생활을 하다보면 이 정도 거리에 사는 지인이 참 가깝게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타국에서 만나는 오래된 친구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갑지만 무척이나 귀한 인연이었다.
"자주 만나세요. 저도 일 년에 두 번은 미주 언니 만나러 파리 오는 걸요?"
재경은 친한 형을 만나기 위해 밤을 새가며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여행 일정까지 바꾸며 이 곳을 찾은 수환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재경 역시, 어떻게 해서든 인천 비행을 받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모처럼 길게 데이오프(Day-off, 비행 근무 후, 받게 되는 휴무)를 받는 날이면 미국에서 유학중인 친구를 만나러 L.A에 가거나, 미주를 만나러 파리로 오곤 했으니까.
"아직 영국 생활 시작한지 반년도 안되었는데, 향수병이라고 해야하나요? 막 친구들도 보고 싶고, 가족도 만나고 싶고해서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하고 오라니까."
"어디 결혼 못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수환은 한창 달달한 신혼을 보내고 있는 진규가 자신을 약올린다는 듯 대꾸했다.
"아휴, 맞아요. 저도 미주 언니 볼 때마다 그런 생각 들어요. 어디 남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말이에요."
"내가 그런 말을 했어?"
"직접한 건 아니지만 형부가 00해줬네~ 형부랑 00에 갔는데~ 노래를 부르잖아."
"내가 언제 그렇게 남편 얘기를 했다고..."
미주는 얼굴을 붉히며 부정했지만 재경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말 안통하는 타지에서 미주의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준 사람은 루이 뿐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루이 언급을 자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덧, 슬슬 정리하고 야경투어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재경아, 이제 우리는 야경투어를 가야하거든."
"야경투어?"
"응. 처음 민박집에 왔던 대학생들이 의견을 줘서 함께 루트를 짰고, 내가 그 뒤로 틈틈히 공부하면서 준비한 우리 민박집의 시그니처 서비스야. 오늘 수환씨가 신청했어."
"오. 그런 서비스도 있단 말이야? 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재경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도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