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모이세요~
"그립긴 뭐가 그리워? 하나도 생각 안나니까 걱정마셔."
재경은 전 남자친구의 이야기가 나오자 손사레를 치며 펄쩍 뛰었다.
"처음 1년은 참 힘들었어. 결혼 소식 들었을 때가 정말 밑바닥이었다고. 이렇게 예쁜 나를 남자들이 가만히 놔둘리가 없었지만, 한동안 남자를 믿지 못하겠어서 그냥 아무도 안 만났어. 일에 열중하고, 승진 시험 준비하고 정말 바쁘게 시간을 일부러 보냈었어."
"못 믿겠다면서 결혼 생각이 어떻게 생긴거야?"
"뭐 언니 보면서?"
"나?"
"응. 언니 결혼해서 사는 걸 쭉 지켜봤잖아. 루이 형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사진 작가도 포기하고 직장을 다녔고, 언니도 많은 걸 포기하고 가정을 지켰잖아.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결혼한다는 건 양보와 희생이 필요한 일인거야.
하지만 나는 전 남자친구와 연애할 때, 내가 얻을 것만 생각했었던 것 같아. 카타르 항공 승무원으로 일을 하면서도, 도하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한국인 남자친구였어. 나는 내 일을 포기하고 싶지않았지만 동시에 퇴사 후의 삶이 늘 걱정되었어. 사실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카타르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겠어? 이런 이중적인 마음에 막연하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 남자친구를 보내주었고, 내가 시간 날 때 이따금 휴가나 인천비행 때 만나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언젠가 내가 퇴사한다면 그가 내 남은 인생을 책임져줄거라고 생각했었던거야. 그래, 그 어느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
큭. 근데 너무 웃겼던건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상대방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거야. 2년 동안,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기에는 도하에서 사는 사람과 연애하는 게 최고였겠지. 더군다나 항공사 승무원이면 할인 티켓도 많이 나오니 유럽이나 아프리카 여행을 주말마다 갈 수 있었고. 그렇게 2년의 시간을 보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평생 맞벌이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무원에 많이 배운 여자와 결혼해서 살 생각이었지."
"그게 왜 네 잘못이야? 애초에 자기 속마음을 속이고 만난 그 자식이 못된거지."
"나도 처음에는 그 사람만 원망했었어. 하지만 내가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대를 만났던 것 같아. 언니 사는 걸 지켜보면서 연애나 결혼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런 마음으로는 평생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없겠더라고. 이제 누군가를 만나면 내 욕심보다는 조금은 양보하고 포기하고 내어주는 그런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미주는 재경이 늘 한결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전세계를 누비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주택담보대출을 갚으며 살아가는 자신에 비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재경이 조금은 철부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재경은 제 나름대로 깊이깊이 성숙해가고 있었다.
"그래. 내가 살아보니까 결혼 생활은 뜨거운 사랑으로 지속되는게 아니더라. 서로에게 성실하고 정직한 게 제일 중요하더라고. 이제 사람보는 눈이 제대로 생겼으니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큭. 소개나 해주고 그런 말 하셔."
"국제결혼도 괜찮다면 내가 알아봐줄게."
"큭큭. 좋아!"
'달칵.'
미주와 재경이 깔깔거리며 한참 웃고 있는데,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비쥬네 민박집의 현관이 열렸다.
"사장님, 저희 왔어요."
지인을 데리고 오겠다던 진규와 소라가 돌아왔다. 예상보다 빠르게 민박집으로 출발한 두 사람은 미주에게 메시지를 보내놓았지만 진경과 대화하느라 미주가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머, 내가 핸드폰을 그만 안보고 있어서 몰랐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미주는 진규와 소라의 뒤를 이어 작은 캐리어를 하나 들고 들어오는 남성을 향해 인사하며 말했다.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남성은 무척이나 피곤해보이는 얼굴이었다. 머리는 덥수룩했고, 깎지 못한 수염이 거뭇거뭇했다. 오늘 하루 묵고 가기로 한 수환이었다.
"이쪽은 제 친한 동생인데 오랫만에 파리에 온김에 잠깐 놀러왔어요."
미주의 말에 재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 명의 투숙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파리는 처음이라고 하셔서... 근사한 곳에서 점심이라도 먹으며 시내 구경 하다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왜 그냥 왔어요?"
"아휴, 수환이 교수님께서 갑자기 발표 자료를 만들라고 하셨다네요. 그래도 일정대로 여행은 해야하니 보통 3일 정도 걸리는 자료 정리를 밤새 해서 끝내놓고 기차 타고 온다고 씻지를 못했대요. 관광은 그냥 저녁에 사장님과 야경투어하는 걸로 만족해야할 것 같아요."
"아이고, 너무 피곤하시겠네요. 일단 방과 욕실 안내부터 해드릴게요. 이리로 오세요."
미주는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는 수환을 데리고 남성 도미토리로 데리고 갔다. 다른 투숙객없으니 밤새 일하고 온 재환이 피로를 풀고, 다음 여행을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환이 짐을 내려놓자 이번에는 재환이 사용할 수건을 건네주고, 욕실로 안내했다. 기차에서 쪽잠을 청해 졸린 건 문제가 안되었지만 씻지 못해 찝찝했던 수환은 바로 욕실로 들어갔고, 미주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럼, 점심도 못 드시고 오셨겠네요. 미리 알았으면 찌개를 좀 넉넉하게 끓일걸."
미주는 여유있게 김치찌개를 끓이긴 했지만, 재경이 3대접은 먹는 바람에 남은게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냄비를 열어보니 김치찌개는 두 국자 정도 푸면 없을 만큼의 작은 양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재경이 김치찌개만 공략한 덕분에 잡채와 밑반찬은 남은 상태.
"밥이랑 잡채 있는데. 괜찮으면 그냥 간단히 한 술 뜨실래요?"
"아휴. 저희야 너무 감사하죠. 원래 조식만 주시는건데..."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요. 밥은 많이 있는데... 그래도 찌개가 조금 아쉬우니까! 내가 김치랑 참치 조금 더 넣고 끓일게요. 15분만 줘요."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진규가 시원하게 설거지를 자처하며 나섰다.
"오늘 설거지 하려면 힘 좀 들거예요. 호호."
미주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김치찌개를 추가로 끓이려면 도마나 칼도 새로 꺼내 써야하니 이미 가득 차있는 싱크대 개수대 안은 설거지거리로 넘쳐버리지 싶었다.
"지금 옆에서 설거지를 조금씩 하고 있죠. 지금 미리 해두어야할 것 같아요."
진규는 잘 익은 포기김치를 꺼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미주의 옆으로 왔다. 진규는 후라이팬에 아직 많이 담겨있는 잡채를 큰 접시에 덜어내어 식탁에 올려놓고, 후라이팬을 개수대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끼고 요리 중인 미주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산스럽지 않게 차분하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미 육수의 맛이 우려나와진 김치찌개에 참치와 김치 약간, 두부 많이, 대파 쏭쏭 넣어 한소끔 끓이자 오히려 처음보다 더 맛있는 찌개가 완성되었다. 소라가 작은 접시에 밑반찬을 덜어 담아내고, 미주가 흰 밥을 밥공기에 담기 시작하자 재환이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왔다.
"어머, 너무 다른 사람 같아요!"
미주는 말쑥한 수환을 보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따뜻한 물로 한 샤워로 피로가 풀려서인지, 면도를 해서인지 시커먼 안색은 뽀얀 빛이 되었고, 덥수룩하던 머리도 단정해져있었다.
"하하. 다른 사람이요? 앞으로 세수 좀 하고 다니겠습니다."
"아이고 사장님. 오죽하면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대학원에 간다는 말이 있겠어요. 지난 밤에 너무 고생을 해서 얼굴이 상하긴 했지만 아주 본판이 못난 친구는 아니에요."
"큭큭. 수환씨, 얼른 오세요. 원래 조식만 주시는건데. 사장님께서 특별히 오늘 점심을 챙겨주셨어요."
"우와, 한식이네요. 감사합니다."
수환은 큼직한 두부가 올라간 김치찌개와 시금치, 당근과 함께 볶아낸 잡채에 눈을 떼지 못하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제 친한 동생이 놀러온다고 해서 음식을 했거든요. 이거 계란말이도 방금 했으니까 같이 먹어요."
너무 반찬이 없는 것 같았던 미주는 급하게 계란말이를 하나 만들어 식탁에 함께 내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귀한 음식을..."
영국에서 잠잘 시간도 부족한 박사생활을 하는 수환은 제대로 된 집밥을 만들어먹기 힘들었다. [3분 짜장]이나 라면을 끓여 먹긴 했지만 그래도 손이 많이 가는 한국 음식은 먹기 힘들었다. 한식당을 가도 왠지 5%가 부족한 그 맛이 아쉬웠다. 하지만 파리 민박집에서 잡채와 무말랭이, 파와 당근을 작게 썰어 부친 계란말이가 있다니... 정말 감격스러운 시간이었다.
"사실 조식을 엄청 기대하고 왔었거든요. 진규 형이 정말 맛있다고 했어서요."
"오늘 놀러오신 동생분 덕분이죠. 감사합니다."
수환의 말에 진규는 몸을 돌려 재경을 향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휴, 아니에요. 미주 언니 손이 큰 덕분이죠 뭐.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제가 손님들 몫까지 간식 사왔으니 식사하시고 같이 디저트 먹어요."
거실 뒷편 소파에 앉아 미주를 바라보던 재경은 갑자기 자신이 소환되자 조금 놀랐지만 곧 손님들이 편하게 식사하실수 있도록 대답해주었다.그리곤 다시 손님들과 이야기와 음식을 나누는 미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꾸리며 안정을 찾아가는 미주가 어느 때보다도 가장 행복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라와 진규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미주는 수환이 선물이라며 사온 영국 홍차를 차주전자에 우려냈다. 차가 맛있게 우려나오는 동안, 재경은 테두리가 금장으로 장식된 커다란 사각 앤티크 접시 위에 간식을 가지런히 꺼내 올려두었다.
"제가 손님들 몫까지 넉넉히 사온거니까 편히 드세요. 대추야자와 두바이 초콜릿이에요. 정확히는 카타르 초콜릿이긴 하지만 맛은 비슷할거예요.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초콜릿도 맛있지만 피칸도 괜찮으니 드셔보세요."
"덕분에 잡채도 먹었는데 간식까지...! 오늘 우리 무슨 계탔나봐요."
"아휴. 이렇게 좋은 홍차도 사오셨잖아요. 손님한테 선물을 받다니, 이런 민박집 사장도 있을까 싶네요. 달달한 간식이라 홍차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제 우리 먹어봐요."
의도치 않게 비쥬네 민박집에서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 각자가 음식을 준비해오는 파티)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