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덴마크에서- 세 번째 이야기
크리스마스 때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면, 누군가는 선물을 풀어볼 때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맛있는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이브날,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고 초를 켜기 전, 저녁 만찬이 시작된다. 시어머니는 이브 전날부터 분주히 주방을 오가며, 이브날 저녁에는 메인 요리를 완성해 낸다. 나는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나름 보조를 맞추며 돕는다. 이브의 만찬은 여느 때보다 한층 격식이 더해진다.
평소에는 주방 식탁에서 식사하지만,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거실 한편에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앤티크 확장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다. 이 원목 테이블은 평소에 여섯 명이 둘러앉을 수 있지만, 그 아래 숨겨진 나무 판을 빼내면 열두 명까지도 앉을 수 있는 신통한 구조를 갖추었다. 덴마크 가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기능적인 식탁이다.
테이블 위에는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초록색 또는 붉은색 테이블보가 깔린다. 나는 짙은 녹색 장식장 안에 고이 간직된 시어머니의 귀한 접시들을 꺼내 정갈하게 세팅한다. 식탁 중앙에는 크리스마스 꽃인 포인세티아가 놓이고, 접시 위에는 산타가 썰매 타는 그림이 그려진 냅킨이 얹힌다.
검소한 시어머니는 덴마크 사람들이라면 하나쯤 갖고 있을 법한 로열 코펜하겐 그릇세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너무 비싸서 실용적이지 않다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깨져도 마음이 적당히 아픈 그릇이 좋아."
금테를 두른 이름 모를 브랜드의 하얀 그릇 세트는 오직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새해처럼 특별한 날에만 식탁 위에 오른다. 평소에는 장식장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다. 어린 시절, 예쁜 찻잔을 장식장에 모셔두고 거의 사용하지 않던 친정엄마의 모습과 겹쳐져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각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고요한 전통 음식이 있다. 시어머니가 시할머니에게서 전수받은 크리스마스 전통 음식을 소개해 볼까 한다. 먼저 붉은 양배추로 만든 달콤하고 시큼한 피클이 있는데, 이걸 먹으면 김치가 없어도 될 만큼 입맛을 돋운다. 이 피클과 삶은 콜리플라워와 당근, 그리고 다음 편에 소개할 디저트 '리살라망(Risalamande)'은 이브 전날에 미리 준비해 둔다.
메인 요리는 오븐에 구운 오리고기이다. 왜 하필 오리고기냐고 시어머니께 여쭈었다.
"글쎄, 옛날에는 집집마다 오리를 많이 길렀어. 오리에는 지방이 많아 겨울철에 먹으면 기운을 북돋아 주지. 아마 그게 전통이 되어 크리스마스에는 특별히 구워 먹게 된 것 같아."
깨끗하게 손질된 오리 속에 사과, 말린 자두, 양파를 썰어 넣고 세 시간가량 천천히 오븐에 굽는다. 마치 삼계탕에 마늘, 대추, 찹쌀을 넣는 것처럼 정성이 가득 들어간 요리이다. 시어머니는 기다리는 동안 다른 요리를 준비하다가도, 마지막에 바늘형 온도계를 들고 오리 가슴살을 찔러본다. 먹기 좋은 70도쯤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완성이 된 후에 오븐 문을 열면, 기름이 지글거리며 구수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진다. 갈색으로 구워진 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부드러워 온 가족이 참 좋아한다.
시어머니는 먹기 좋게 부위별로 잘라 큰 접시에 담아낸다. 오리고기는 때로 햄으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덴마크 사람 넷 중 셋이 선택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여기에 설탕과 버터로 은근히 졸여 만든 캐러멜 감자와 그레이비소스가 곁들여진다. 평소엔 냄비째 식탁에 오르던 소스도 이날만큼은 아름다운 튜린에 담겨 서빙된다. 음료는 적포도주, 맥주, 탄산수 중 취향에 맞게 골라 마신다. 이 음식들은 커다란 식탁을 풍성하게 채우면서 가족의 마음까지 행복으로 메워준다.
"맛은 괜찮아? 좀 더 먹어."
항상 그렇듯 시어머니의 음식은 풍미가 깊고, 먹고 나면 포만감이 오래간다. 한국의 어머니들처럼 시어머니도 늘 더 먹으라 하신다. 시골 생활은 몸을 쓰는 일의 연속이라 그런지, '많이 먹어둬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런 말 한마디가 참 정겹다. 한국의 명절이 그러하듯, 덴마크의 크리스마스도 언제나 부족함 없이 음식을 만들기에, 다음 날도 남은 음식으로 다시 한번 푸짐한 식탁을 차린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 또한 작은 행복이다.
유럽을 떠나 다른 나라, 혹은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면 나는 덴마크의 전통 음식을 만들곤 한다. 조금이라도 그 아늑하고 즐겁고 풍성한 분위기를 내보려는 것이다. 물론 같은 재료를 찾을 수 없어 완벽히 재현할 수는 없지만, 향과 색을 맞추려 노력한다. 그러나, 어려운 오리고기 대신 간편한 햄을 오븐에 구워 저녁을 준비한다. 음식의 모습은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어도, 시어머니의 손맛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 항상 아쉽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오븐 속에서 익어가는 햄과 소시지를 바라보면 덴마크에서 보냈던 크리스마스이브의 따뜻한 웃음소리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때의 시간들은 음식의 향을 통해 천천히 되살아나며, 우리 가족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