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덴마크에서 - 두 번째 이야기
매년 11월 말이면 어김없이 덴마크에서 큰 선물 상자가 도착하곤 했다. 여러 나라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딸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 상자는 한 해도 빠짐없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상자 안에는 크고 작은 선물들이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묶여 있었다. 선물마다 풀어볼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중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은 언제나 더 크고 화려해 보였다. 상자 속에는 어드벤트(advernt) 달력도 들어 있었다. 12월 첫날부터 아이는 그 날짜에 해당하는 종이문을 열고, 네모난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 달콤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의식인 셈이었다.
나는 문고리에 크리스마스 양말을 걸어 두었다. 밤이 되면 다음 날의 선물을 미리 그 속에 넣어 두곤 했다. 그때 양말을 보며 기대에 부풀어 있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엄마, 내일 선물은 뭘까요? 너무 궁금해요!"
"빨리 자면 일찍 일어나서 선물을 풀어볼 수 있을 거야."
평소에는 늦잠꾸러기였던 아이가 12월에는 제일 먼저 깨어났다. 부스스한 얼굴로 문고리로 달려가 양말 속을 뒤적이며 말했다.
"아, 이건 뭘까?"
포장을 풀기 전, 딸은 선물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곧 '찌익 찌익' 포장지 뜯는 소리가 들렸다. 포장지 속에는 시어머니가 직접 뜬 무지개색 양말, 아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사탕봉지, 안데르센 동화책, 놀이 카드, 학교에서 필요한 문구류, 그리고 덴마크 하면 빠질 수 없는 레고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 집의 따뜻한 냄새를 품은 선물들은 손녀의 손끝까지 그 온기를 전해 주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지만, 아이의 하루를 행복하게 감싸주었다. 때때로 그걸 품에 안은 채, 아이는 다시 잠이 들기도 했다. 그때 딸은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아이는 이 과정 속에서 기다림을 배우게 되었다. 그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설렘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큰 선물을 풀어보는 이브가 될 때까지, 행복해하며 하루하루를 세어 갔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렇게 손주를 갖고 싶어 했던 시부모님의 마음도 똑같았을 것이다. 손녀를 생각하며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던 그 시간 속에서 그분들도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느꼈을 테니까.
남편이 어렸을 때, 시어머니는 양말이 아닌 크리스마스 슬리퍼 안에 선물을 숨겨두고 창가에 놓았다고 했다. 아침에 선물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 남매를 보며 시어머니는 말했다.
"니쎄가 밤새 선물을 몰래 놓고 갔나 보네."
'니쎄'는 전설 속에 존재하는 작고 신비로운 크리스마스 요정인데, 동시에 장난꾸러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귀여운 도깨비 같은 느낌이랄까. 니쎄는 12월의 첫날부터 집들을 방문하는데 심술궂게 건포도 봉지를 찢어 집안에 뿌려놓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은 선물을 가져온다고도 한다. 어린 남매는 요정이 창문으로 들어와 예쁜 선물을 두고 갔다고 믿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나는 12월 중순쯤 미리 받은 선물 꾸러미를 참지 못하고 열어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마치 '국룰'을 어긴 사람이라도 본 듯 놀랐다. 그 이야기가 시어머니에게 전해졌고, 전화 너머로 그녀는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미리 열어보면 안 돼. 앞으로는 꼭 이브까지 기다려야 해. ”
그때는 웃어넘겼지만, 지금은 그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 기다림 속에서 쌓인 기대와 설렘이 진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때마다, 이 '국룰'을 꼭 지킨다.
아이가 십 대가 되면서 가끔은 선물이 시시하다며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선물 상자가 끊기자 섭섭해하던 딸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물질주의에 물들어버린 사춘기 손녀의 입맛을 시골 할머니가 어찌 다 맞출 수 있겠는가. 그래서 커다란 선물 상자는 현금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이브날에는 손수 만든 스웨터나, 카디건, 쿠키처럼 물질로 채울 수 없는, 온기가 스며든 따뜻한 선물이 도착한다.
매년 덴마크에서 날아오던 선물상자는 지금도 아이에게 특별하고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선물 자체보다, 밤마다 달콤한 꿈을 꾸며 기다림 끝에 만났던 덴마크 할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크리스마스까지는 두어 달이 남아있지만, 벌써 마음이 설렌다. 기다림이라는 따뜻한 선물을 품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