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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켜진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는 덴마크에서 -첫 번째 이야기

by 새벽별


영국에서 살던 2000년대 초, 처음으로 덴마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 여름의 초록빛 풍경과는 달리, 겨울의 덴마크는 무채색에 가까웠다. 시골길엔 눈이 희미하게 덮여 있었지만, 시내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만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황량하고 추운 겨울에 크리스마스마저 없었다 사람들은 훨씬 더 쓸쓸했을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족이 함께 모이는 가장 큰 명절이니까.


그해, 영국에서 저가 항공편으로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쯤 도착했다. 덴마크에서 12월 23일은 '작은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부른다.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이브 전날, 다른 부모의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다. 참 공평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하다.


시댁에 도착하니, 시어머니는 이미 장을 보고 다음 날 만찬을 위해 샐러드와 디저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거실에는 아직 장식되지 않은, 내 키만 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밋밋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트리가 진짜 나무였다! 풋풋한 나무향이 거실에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플라스틱 트리만 보던 나로서는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대부분 생나무를 쓴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함께 트리를 장식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에는 추억이 깃든 것들이 많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것, 아이들이 만든 것, 선물로 받은 것들을 하나씩 가지에 걸었다. 남편이 어린 시절 종이로 만든 작은 천사였던가? 그걸 달며 귀여워서 웃었던 생각이 난다. 어떤 장식품은 너무 오래되어 색이 바랜 것도 있었는데, 그것마저 정겨웠다.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절친인 마깃 할머니가 주신 종이별을 한국 트리에 단다. 덴마크에 갈 때마다 반갑게 안아주시던 그분을 추억하면서.


크리스마스트리의 하이라이트는 이브날 저녁 식사 후에 찾아왔다. 시어머니와 내가 주방을 정리하는 동안 남자들은 중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남편이 나오더니 말했다.


"이제 문을 열 테니까 트리 좀 봐!"


마치 무대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듯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거실은 희미한 안갯속 같았다. 그 속에서 나뭇가지마다 작은 촛불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던 장식들도 그 빛을 받아 다시 살아났다. 꿈결 같았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와, 정말 예쁘네요! 그런데, 촛불을 켜서 불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감탄하며 시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누구라도 그런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초가 나뭇가지에 닿지 않게 꽂혀 있어서 괜찮아.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는 온 가족이 같이 있잖니. 혹시라도 불이 나면 바로 알 수 있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 후로도 몇 해 동안은 늘 같은 방식으로 트리에 불을 밝혔다. 요즘은 타냐와 조용히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시부모님은 안전을 위해 LED 촛불을 쓴다. 고상한 멋은 사라졌지만, 그게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식사 후 켜진 촛불은 작은 행사를 마치고 선물을 나눈 뒤에 꺼진다. 그때는 길쭉한 촛불 소등기를 사용한다. 우리가 다시 방문했던 겨울에는 아이가 손에 닿는 촛불을 끄기도 했다.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소등기를 잡고 초를 덮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찬란하게 밝히던 트리는 이듬해 1월 첫 주말 즈음에 정원으로 옮겨진다. 그리고는 새들이 앉아 쉬는 쉼터가 된다. 올여름 덴마크에 갔을 때도 현관 앞 작은 정원에, 색이 누렇게 바랜 트리가 그대로 서 있었다.


여름의 덴마크도 좋지만, 차가운 겨울날 벽난로의 따뜻한 온기와 생나무 트리의 향, 그리고 촛불이 어우러진 풍경은 더없이 아늑한 '휘게'의 순간을 만들어 준다. 명절은 원래 북적거려야 좋은 법인데, 매년 함께하지 못해 늘 아쉽다. 하지만, 언젠가는 크리스마스에 다시 덴마크에 갈 것이다. 그때는 마음속에 간직했던 초를 하나씩 꺼내어, 생나무 트리에 진짜 촛불을 다시 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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