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르스크 타워(Marsk Tower) 이야기
2000년대 초, 처음 덴마크를 방문했을 때였다.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섬에서 기차를 타고, 안데르센의 고향인 퓐섬을 지나 윌란반드 남부로 향하던 길. 작은 도시들을 가끔 스쳐갔지만, 창밖 풍경은 고요했다. 평평한 땅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던 공장이나 고층빌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덴마크는 뭘로 먹고사는 거지?'
덴마크는 인구가 6백 만도 채 되지 않고,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제외하면 면적도 남한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내가 알고 있던 덴마크 관련 정보라고 해봤자, 행복한 나라, 안데르센 동화, 레고, 베이컨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유럽의 대표적인 부유국 중 하나라니! 겉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는 수입원이 쉽게 짐작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일단, 농축산업이 제일 크고, 코펜하겐에서는 국제 행사가 자주 열려. 그리고 덴마크는 디자인 강국이기도 해. 시드니의 유명한 오페라하우스도 덴마크 건축가 요른 웃손 작품이지."
"흠, 축산업은 알겠는데, 그걸로 얼마나 벌겠어? 또 디자인이 유명하다는 건 처음 듣네."
이렇게 반문하면서 좀 더 알아보니, 덴마크는 농축산업 외에도 의약품, 해운업, 에너지 산업이 주요 수출 품목이었다. 또한 심플하면서도 실용적 디자인의 생활 용품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블루 컬러로 유명한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은 세계 3대 도자기회사로 꼽히고, 인기 있는 미드센츄리모던 가구와 조명 역시 덴마크 제품이었다. 한국처럼 눈에 띄는 대기업과 공장이 없다고 해서 조용히 사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가 물러간 해 여름, 다시 덴마크를 찾았을 때 시부모님은 근처에 새로 생긴 타워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시댁에서 북쪽으로 약 30분쯤 가면, 시아버지가 종종 볼링 치러 가는 스케르벡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그곳 바덴해 국립공원 안에는 덴마크의 세계적인 건축 그룹 'BIG(Bjarke Ingels Group)'가 2021년에 세운 나선형 타워가 있다. 중앙에는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습지란 뜻의 '마르스크' 타워는 25미터 높이로, 멀리서 보면 회오리바람처럼 보인다. 꼭대기에 오르면 18킬로까지 시야가 확장되어, 맑은 날에는 독일의 질트 섬, 덴마크의 뢰뫼 섬, 멀리 북해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날, 하늘은 비가 올 듯 잿빛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드넓은 평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타워는 미국 영화 속 토네이도처럼 묘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독특한 디자인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비틀리거나 꼬인 구조와 사람의 DNA가닥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치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융합된 듯한 느낌이었다. 강철과 자연의 만남은 어색할 법도 한데, 특이한 디자인 덕분인지 의외로 잘 어울렸다.
이중으로 된 나선형 계단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합해 272개로 힘들 것 같지 않았다. 모두 같이 올라가려고 했지만, 시부모님이 탈 엘리베이터는 미리 예약했어야 했다. 두 분은 전에도 와 본 적이 있어, 타워에 관심 없는 손녀와 함께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힘들기보다는 고소공포증이 느껴져 약간 아찔했다. 하지만, 남편과 뚜벅뚜벅 천천히 발을 디뎠다.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마치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꼭대기에 다다르자, 세찬 바람이 불었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장엄했다. 빌딩숲으로 막힌 것 없이 탁 트인 시야! 하늘과 바다와 땅만 존재하던 태초의 지구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전망대에서 인증숏을 남기고 타워에서 내려온 뒤, 우리는 옛날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주변에는 캠핑장도 마련되어 있어, 국립공원의 자연을 탐험하려는 캠핑카와 글램핑 손님들도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은 붐비기 시작했고, 우리는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한국 같았으면 벌써 자리를 떴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빠른 서비스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덴마크 식당에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느긋한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속도일지 모르겠지만, 내겐 이런 풍경이 아직도 낯설다. 그래도 기다림 끝에 받아 든 정갈한 음식은 신선하고 맛있었다. 심플하지만 멋스러운 그릇에 담긴 음식은, 단순한 한 끼를 넘어 작은 예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불편함이 나간 자리에 만족감이 들어섰다.
돌이켜보면, 덴마크 사람들의 먹고사는 힘은 단지 농축산업이나, 디자인, 해운업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자연과 어울리는 생활, 삶의 속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상 속 균형, 단순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힘. 이런 것들이 모여 결국 이 작은 나라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싶었다.
오래전에 던졌던 질문,
"도대체 덴마크는 뭘로 먹고사는 거지?"
20여 년이 넘도록 매년 덴마크를 찾으면서 얻은 답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마르스크 타워 꼭대기에서, 하늘과 바다와 땅이 맞닿은 풍경을 내려다보며 깨달았다. 덴마크 사람들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들을 지탱해 주는 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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