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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덴마크 사람들?

8. 여름 해변 '옙스테드(Hjerpsted)' 이야기

by 새벽별

덴마크에서 돌아오면 늘 깊은 후유증이 남는다. 무엇보다 날씨 때문이다. 제주의 장마는 이미 지나갔지만, 숨 막히는 무더위가 이어져 한 발짝도 밖으로 나서기 힘들다. 육지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주에서 이렇게 더운 날이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해변으로 몰려간다. 그러나 덴마크의 여름은 다르다. '한여름'이란 단어조차 어색할 만큼 덥지 않다. 아침저녁은 선선하고 때로는 쌀쌀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볕이 좋은 날이면, 사람들은 해변으로 가 일광욕을 즐기거나 물놀이를 한다.


시댁 근처에도 '엽스테드'라는 작은 해변이 있다. 예전에는 가족과 자주 찾았지만, 제주로 이사 온 뒤로는 뜸해졌다. 그래도 소풍삼아 하루를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해변에 깔아놓은 긴 타월이나 간이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로 간단히 요기를 한다. 어느 날은 밥이 그리워 초밥을 포장해 와, 해변에서 먹은 적도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초밥도 달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갯바위에 붙은 작은 홍합으로 국을 끓여, 한국 음식의 그리움을 달랜 기억도 있다.


엡스테드의 바다는 남태평양의 에메랄드 빛도, 제주의 푸른 바다빛도 아닌 검푸른 회색빛이다. 처음에는 조금 무섭게 느껴지지만 의외로 즐길 거리가 많은 곳이다. 바다에서 밀려온 조개껍질이나 조개 화석을 줍기도 하고, 썰물 때는 맨발로 진흙밭을 걸으며 조개를 캐거나 물새를 바라본다. 물이 천천히 차오르면 얕은 바다는 아이들에게 신나는 놀이터가 된다.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짓던 아이는, 무릎 높이의 잔잔한 바다로 가 뛰어논다. 쌍둥이처럼 보이는 두 꼬마는 마주 앉아 소꿉놀이에 열중한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풍경은 마치 동네 개울가 같다.


휴가철이면 가까운 독일에서 캠핑카를 몰고 오는 이들도 많다. 굳이 돈을 내지 않아도 되고, 자릿세조차 없는 덴마크의 해변은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제주나 육지 해수욕장에서 들려오는 자릿세 다툼 뉴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어느 날, 캠핑카 행렬을 본 남편이 독일어로 한마디 툭 던졌다.


"Die dummen Dänen!"


무슨 말이냐 물으니, '바보 같은 덴마크 사람들'이라고 했다. 18세기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된 말로, 북부 독일 사람들이나 덴마크에 사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쓰였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는 덴마크인을 비하하는 의미라 조심스럽지만, 지금 이 지역에서는 대체로 유머 섞인 농담처럼 쓰인다. 돈이 될 만한 장소를 그냥 무료로 내어 주는 덴마크인의 모습이 독일인의 눈에는 '바보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옙스테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독일의 질트(sylt) 섬이 있다. 부자들의 휴양지로 알려진 곳으로, 물가가 꽤 비싸다. 그곳은 해변 입장료를 내야 하며, 의자를 빌리려면 10유로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의 파라솔 자릿세처럼 사용료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 독일인들에게 본국의 질트 해변보다는, 덴마크의 시골 해변이 훨씬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옙스테드는 질트처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덴마크 정부에서 개발하면 관광객들을 끌 수도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해변은 처음 봤던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투박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옙스테드 해변과 질트 섬 해변>


민족 성향에 선입관을 두고 싶지 않지만, 내가 들은 독일인은 근면하며 효율성을 중시한다고 한다. 반면 내가 직접 겪은 덴마크인은 다소 서툴러 보여도 욕심부리지 않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바보가 아니라, 삶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낙천주의자들일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덴마크 사람들'이란 표현은 오히려 그런 부러움에서 나온 말은 아닐까.


덴마크의 여름 해변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두의 것이다. 그런 혜택을 입은 나도 옙스테드에서 가족과 함께한 즐거운 추억들이 많다. 해변은 있는 그대로 내어주고 나누는, 그곳 사람들과 닮아 있다. 덴마크에서 돌아올 때마다 겪는 긴 후유증은, 어쩌면 날씨보다는 그런 소박하고 넉넉한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Die Dummen Dänen (proverb)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질트 섬 사진 출처:Exploring Germany’s northernmost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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