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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풍경, 그 너머에는

6. 라들룬트 강제 수용소 이야기

by 새벽별

시댁에서 늘 북서쪽으로만 향하던 운전대를 이번에는 잠시 남쪽으로 돌린다. 집에서 불과 10여 분만 가면 독일 땅인데, 국경을 넘을 때는 여권을 챙겨야 한다. 국경 검문소는 EU 이후로 사라졌지만, 가끔 순찰 중인 경찰을 만날 수도 있다.


이번 나들이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딸이 성장하면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비극적 역사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 근처에 강제 수용소 기념 공원이 있다기에 가보기로 했다. 남편에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강제 수용소가 있었다고?"


국경을 넘어도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진 평야, 드문드문 자리한 오래된 집들, 바라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아름다운 전경이었다. 물론 시어머니처럼 '찐'덴마크인들에게는 미묘한 차이가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덴마크 시골처럼 그저 고요하고 예쁜 동화 속 풍경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동화라 해도 그 속엔 어둠이 존재하듯, 이곳에도 그늘진 역사가 남아 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하면, 많은 유대인이 학살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독일 점령지에 세워진 수용소는 놀랍게도 1만 5천 곳에 달했다. 대부분은 노동 수용소였지만, 집단학살을 목적으로 한 절멸 수용소(Extermination camp)도 십여 곳이나 건립되었다. 강제 수용소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전쟁포로, 집시, 정치범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수감되었다.



드넓은 밀밭과 옥수수밭이 펼쳐진 시골길을 따라가니, 큰 키의 가문비나무들이 모여 있는 한적한 곳에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바람은 잔잔했고, 새소리는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햇살은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라들룬트 강제 수용소(Ladelund concentration camp)' 기념 공원이다. 주차장도 없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너무 작아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공원에 닿기 백여 미터 전에는 큰 자연호수가 있는데, 지역주민들이 수영장으로 즐겨 찾는 곳이라 한다. 시어머니의 지인도 손주들을 데리고 그곳을 자주 찾았지만, 정작 근처에 이 기념 공원이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숨겨진 장소 같았다. 독일에서는 그리 자랑스러울 리 없는 장소이기에, 표지판조차 없는 것일까?


"너무 작네요. 수용소 건물도 없고요."


실망한 듯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정말 수용소가 있던 자리였는지 의아할 정도로, 소박하고 아늑했다. 기념 공원에는 기념석, 수용소 설명판, 그리고 철조망을 넘어 탈출하려는 조형물이 전부였다. 멀지 않은 교회의 마당에는 희생자의 묘가 있고, 그 근처에 작은 기록관이 있을 뿐이었다. 둥근 기념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될 수 없다."

뇌엔감 강제 수용소, 외부 사령부 라들룬트

1944년 11월-12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곳 독일 철학자인 칸트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라는 인간 존엄성의 철학이.


하지만, 이 수용소에서는 인간이 노동력의 도구로 전락했다. 80여 년 전,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존엄성은 이곳에서 처참히 짓밟혔다. 기념석에 새겨진 그 문장은 당연한 진리지만,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했던 그 역사를 상기시키며, 반복하면 안 된다는 경고의 역할을 하는 듯했다.




<수감자가 그린 당시 막사 안의 모습>

1944년 겨울, 불과 한 달 반 동안 2천 명이 넘는 수감자가 이곳에 갇혔고, 그중 300여 명은 가혹한 노동과 영양부족,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12평 남짓한 막사에서 백여 명이 생활했다니, 당시의 참상이 얼마나 참혹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솔직히 그때 안 태어난 게 정말 행운 같아요. 여긴 아우슈비츠처럼 유명하진 않아도, 죽은 사람들의 고통은 똑같았겠죠?"


덴마크에서 항상 밝던 딸의 얼굴이 어두워진 순간이었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에 비해, 이 기념공원의 규모는 작았다. 그 협소함은 수용자들이 지냈던 좁고 숨 막히던 막사의 공간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평온과 고요만이 이곳을 감싸고 있지만, 그 너머에 감춰진 비극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타국에서 강제 노동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수감자들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끌려가 혹사당했던 우리 선조와 닮아 있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나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서 있으니 그 아픔이 스며드는 듯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조 덕에, 내 나라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깊은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너무 아프기에 그 고통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어떤 고통은 그 아픔을 들춰내서라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잊지 않음으로써 다시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기에. 그래서 작고 소박한 기념 공원일지라도, 존재해 있다는 사실이 소중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씁쓸하고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던 딸이 말했다. 고요와 평화가 깃든 그 풍경이 딸의 세대를 넘어, 영원히 이어지길 나는 마음속 깊이 기원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Ladelund_concentration_camp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C%B9%98_%EA%B0%95%EC%A0%9C_%EC%88%98%EC%9A%A9%EC%86%8C_%EB%AA%A9%EB%A1%9D


기념공원 주소: KZ-Außenlager Ladelund, 25926 Ladelund,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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