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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는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

5. 폐허, 트뢰이보르 성에서 만난 개 이야기

by 새벽별

"그 개는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


햇살이 쨍쨍하던 2017년의 어느 여름날. 어린이 공원을 다녀온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갑자기 시아버지가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당시 덴마크어가 많이 서툴렀던 내게, 남부 사투리는 더 알아듣기 어려웠다. 사실 표준어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남편이 영어로 통역을 해 줬지만, 여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폐허'라 부르는 '트뢰이보르' 성(Trøjborg Castle)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다. 그제야 시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했다. 옆에서 듣던 딸은 또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딸이 태어나기도 전인 2000년대 초반이었다. 덴마크에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시부모님은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 주셨다. 그때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덴마크어와 영어 설명에 지쳐, 괜히 남편에게 짜증 부렸던 한심한 기억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성이었다.


트뢰이보르 성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아름다운 들과 아늑한 숲으로 둘러 싸여 있다. 옆으로는 농장이 자리하고, 목초지에서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경치가 아름다워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고, 시부모님이 게스트하우스 손님을 데려가는 명소이기도 하다.



성은 13세기 초반, 남덴마크의 발데마르 공작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에는 13미터 높이의 큰 탑과 해자를 갖춘 전형적인 중세시대의 성이었다. 여러 주인을 거쳐 1854년, 마지막 소유자가 신학교 설립을 위해 국가에 기부하려 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철거되었다. 성을 건축할 때 사용한 돌은 이 지역의 교회와 농장을 짓는데 다시 쓰였고, 지금은 성벽 일부와 지하실만 남아 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의 화려했던 성이 폐허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보니, 삶의 덧없음이 떠올라 공허함을 느꼈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폐허로 들어서자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무서워졌다. 그때 시아버지가 '밤이 되면 귀족이었던 머리 없는 귀신이 이곳에 출몰한다'는 전설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귀신 흉내를 내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오싹한 이야기는 곧 코미디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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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를 진짜 놀라게 한 것은 귀신 이야기가 아니었다. 성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정말 송아지만 한 검은 개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람한 체구와 사나운 인상에 우리는 움찔했다. 그 순간 시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쥔 채 두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 손가락으로 네 눈을 파 버릴 거야'하는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그 개는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우리가 성으로 들어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짱가'처럼 시아버지는 우리를 위험에서 구출해 주었다. 그래서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주었다. 목축업으로 평생을 바쳤던 그의 경험이 빛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아버지는 성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매번 농담처럼 묻곤 했다.


"그 개는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 "


우리는 늘 대답한다.


"여전히 겁에 질린 채로 앉아 있을 거예요."


마침 딸아이가 가본 적이 없어 들러 보기로 했는데, 또 한 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폐허 입구에 비슷한 크기의 큰 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회색 털에 검은 얼룩이 있는 인상 좋은 개였다. 더구나 녀석은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고 말았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검은 개가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이런 우연은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올해, 서쪽 도시 리베에서 놀다 돌아오는 길에 옛 생각이 나 그 폐허에 들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한 중년 여성이 큰 황색 개를 데리고 농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색깔은 달랐지만, 여전히 '큰 개'였다. 이쯤 되니 트뢰이보르 성과 개는 뗄 수 없는 인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찍고, 웃으면서 폐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졌다. 투둑투둑, 해자 위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 우리는 나무 아래로 빨리 피했다. 좀 전까지 맑은 하늘이었는데, 비가 오니 폐허는 더욱 음산하게 변했다. 오싹한 기분에 다리를 건널 생각도 못하고 농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 잼을 파는 작은 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잼을 하나 사서 시어머니에게 드리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20여 년 전 처음 만났던 그 개와 꼭 닮은 검은 개가 풀숲에 앉아 있었다! 마치 시아버지가 무서워 주저앉은 그 개의 모습처럼. 우리는 믿기 어려운 우연에 서로 놀라워하며 사진을 찍어 시부모님께 전송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하하, 그 개가 아직도 거기에 있네!"


한때 부귀영화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성은 폐허가 되었지만, 우리 가족의 추억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언젠가 다시 그 폐허를 지나게 되면, 시아버지의 그 익살스러운 질문이 계속되길 바란다. 그러면 나는, 짜증 대신 감사한 마음으로 잔웃음을 지을 것이다.



트뢰이보르 성 https://trojborg.net/en/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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