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여(Højer)의 노을에 빠지다

3. 바닷가 마을의 아름다운 해넘이 이야기

by 새벽별

시댁은 덴마크 남쪽에 위치하지만, 서쪽 바다와도 멀지 않다. 차로 10여 분만 달리면 호여(Højer)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은 남덴마크 특유의 시골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치 오래된 엽서 속 풍경처럼, 초가지붕집과 옛 교회, 풍차까지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호여의 진정한 매력은 호여 댐(Højer Sluse)에서 바라보는 장엄한 노을에 있다.


이 마을이 위치한 서쪽 바다, 바덴 해(Wadden Sea)는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세 나라에 걸쳐있는 거대한 갯벌 해역이다. 밀물과 썰물이 만들어낸 독특한 생태계는 철새들의 주요 이동 경로이자 번식지로 유명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호여는 이 바덴 해의 일부로, 넓은 평야와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국립공원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곳은 매년 우리가 즐겨 찾는 곳 중 하나이다. 낮에 주로 방문하는데,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 갈 때마다 들르곤 한다. 맛이 풍부하고 식감이 부드러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맑은 날에는 댐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으로 멀리 독일 질트(Sylt) 섬까지 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바다표범도 발견할 수 있다.


한번은 시아버지가 바다표범을 봤다고 해서 망원경으로 열심히 찾아봤지만, 그 사이 물속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시아버지의 장난이었다. 그 후 다른 날 방문했을 때, 건너편 섬 해변에서 콩알만 한 것들이 꼬물거리는 걸 보았다. 너무 멀어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들 바다표범이라고 해서 신기했다.


20250629_154803.jpg
<인적이 드문 예쁜 동네, 맛있는 아이스크림>
호여집.jpg
20250629_160633.jpg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된 풍차와 그 옆의 카페>


덴마크의 날씨는 예측하기 어렵다. 맑다가도 금세 흐려지고, 또 비가 오다가도 햇살이 쏟아진다. 운 좋게 맑은 어느 여름 저녁, 우리는 오랜만에 호여 해산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그곳에서 산책하기로 했다. 덴마크의 여름은 낮이 길어, 밤 10시가 넘어야 해가 어둠과 교대한다. 여전히 밝고 푸른 하늘 아래 차를 타고 호여로 향했다.


조용한 길을 따라 도착한 마을은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한적했고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댐 근처의 식당에 다다르니, 사람들로 붐볐다. 관광객들이 많은 탓이리라. 특히 그날은 지역 가수가 공연을 한다기에 만석인 것 같았다. 우리는 훈제 연어와 바비큐로 갓 구워낸 조개구이를 주문했다. 바닷가 마을답게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여가수의 목소리와 밴드의 흥겨운 연주가 식사 분위기를 더욱 즐겁게 북돋았다.


20250705_183345.jpg
<연어를 직접 화롯불로 훈제하고 소시지와 조개는 야채와 함께 바비큐 판에 굽는다>
1726041996925-24.jpg
<전망대와 아름다운 노을>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가 드넓은 평야와 바다 위를 주홍빛, 자줏빛,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순간의 풍경은 숨 막힐 듯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지금 제주 남서쪽에 살면서 매일 황홀한 노을을 보며 살지만, 아직도 그날의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눈부셔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휘황찬란한 일출보다, 아무런 부담 없이 은은하게 마음을 적셔주는 석양이 더 좋아진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남편은 우연히 학창 시절 친구를 만났다.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만난 그들의 얼굴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워 보였다. 친구와 나란히 서서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잠시 후, 시부모님도 동네 사람들을 만났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분들이니, 어딜 가든 지인을 자주 마주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시부모님은 그들과 짧게 담소를 나눈 뒤, 다시 우리와 함께 노을을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녁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젊은 연인들은 풀밭 위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속삭였고, 가족들은 아이들과 함께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해넘이를 지켜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노을의 마지막 빛줄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딸아이는 깊이 감동한 듯 말했다.


"엄마, 나중에 내가 돈을 많이 벌면, 이 호여 땅을 사고 싶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내 걸로 만들고 싶어요."


물론 그 소원은 실현되지 못하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아이의 순수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딸도 저녁노을과 산책을 무척 즐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또 오자고 했다.


그날 우리는 모두 호여의 노을에 풍덩 빠져버렸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가질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쉽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마치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더 그리운 옛 추억처럼. 그러나, 내일 또 다른 노을이 우리를 반겨줄 거라는 믿음으로, 아쉬운 마음은 그만 접고 발길을 돌렸다.


호여 댐 주소: Slusevej 25, Nationalpark 6280 Højer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9화낮은 지붕 아래서 나눈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