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샤켄보르(Schackenborg) 성 이야기
*남덴마크의 시골은 나의 여름날을, 늘 아름다운 기억으로 채워주는 곳이다.
이번 글부터는 가족과 함께했던, 추억이 깃든 소소한 장소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시댁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시간 여행을 하는 듯 오래된 마을이 나타난다. 그 초입에는 아담한 성이 여행자들을 환영하듯 서 있다. 7월 초의 오후, 하늘에는 먹구름이 옅게 깔렸지만, 바람은 선선했고 걷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이번에는 차가 아닌, 걸어서 그 성을 향해 천천히 가보기로 했다.
집을 나서자, 이웃집 말들이 목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오솔길에서 바라보는 너른 들에는 황금빛 밀밭과 이름 모를 풀들이 바람결에 일렁거렸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풍경을 카메라와 내 눈에 담았다. 차로 갔을 땐 몰랐던 바람소리, 풀들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함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싶다.
오솔길을 벗어나 차도를 지나면 키 큰 가로수들이 늘어선 돌길이 나타난다. 옛 마을에 도착했다는 신호다. 돌길을 걷는 느낌은 울퉁불퉁하지만, 표면은 긴 세월이 닦아놓은 듯 반들반들 매끄럽다. 가끔 행사가 열릴 때, 이 길로 마차가 지나가곤 한다. 그때 말발굽이 돌바닥에 울리는 소리는 마치 중세시대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돌길을 저벅저벅 걸어 성의 입구인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 아래로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인 해자가 흐른다. 다리를 건너 빨간 지붕의 관리인 숙소를 지나면, 감색 지붕에 디귿자 모양을 한 소박한 성이 보인다. 바로 샤켄보르(Schackenborg) 성이다.
이 고성은,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숲 속의 커플' 요아킴 왕자와 알렉산드라 백작 부인이 신혼부터 이혼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미국으로 이주한 왕자가 재혼 후에도, 2014년까지 생활했고, 그의 아이들도 여기서 유치원과 학교를 다녔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왕자가 정말 이웃인 셈이다. 지금은 비영리재단이 성을 관리하며, 왕실 사람들이 가끔 휴가차 방문하기도 한다.
성의 외관은 소박하고 아담하지만, 내부는 의외로 화려하다. 푸른 정원은 성보다 몇 배나 넓고, 정돈이 잘 되어 있다. 한 무리의 관광객이 가이드를 따라 성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성 뒤쪽의 작은 마을은 고즈넉하고 예뻐서, 돌길에는 구경하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곤 한다. 예전에 성 입구 맞은편에서 가족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곤 했는데, 문을 닫았는지 올해는 보이지 않았다.
샤켄보르 성은 원래 뫼겔톤더후스(Møgeltønderhus)라는 성으로, 17세기 중반에 덴마크 왕이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한스 폰 샥(Hans Von Schack) 백작에게 하사했다. 단, 가문을 이을 후손이 없을 때는 다시 왕실 소유가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백작은 낡은 성을 대부분 철거하고 바로크 양식의 샤켄보르 성을 새로 건축했다. 이 성은 11대에 걸쳐 폰 샥 가족이 소유했는데, 마지막 후손이 죽자, 1978년에 다시 덴마크 왕실로 귀속됐다. 왕실과 귀족의 300년 전 약속이 이렇게 지켜지다니, 참 놀라울 따름이다.
샤켄보르 성에서는 매년 클래식 음악제가 열려, 세계의 유명한 연주가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해 준다. 몇 년 전에, 시어머니의 초대로 딸과 함께 야외 콘서트에 간 적이 있었다. 그날은 늦은 오후로 기억하는데, 역시 시골이라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클래식이 연주될 때 조용히 경청하던 관객들은,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는 함께 따라 부르곤 했다.
올여름, 시어머니의 게스트하우스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묵었다. 바로 성 맞은편 공터에서 열리는 '마차 드라이빙 대회'에 참가하는 손님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코펜하겐에 간 사이라 그 행사를 못 봤다. 조용한 시골에 흥미로운 행사가 열리면, 시어머니는 촬영했다 보여 주시곤 한다. 영상 속 장면은 19세기 복장의 신사와 숙녀들이 아름다운 마차를 타고 성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빨강머리 앤>의 '애본리' 마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의 정겨운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남편은 어릴 적, 샤켄보르 성 관리인 아들과 친구였다고 한다. 자주 성에 놀러 가서, 큰 정원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았다. 넓은 정원의 한쪽 구석에는 작은 대포들이 있는데, 친구 아버지는 대포 위에 올라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청개구리 같은 남편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대포를 타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런데, 성 안에서 중년 부인이 나오면서 손짓을 하더란다. 야단맞을 줄 알고, 둘은 빨리 도망쳤다. 그 여성은 다름 아닌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이었다. 인자한 그분은 그저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딸은 콘서트 공연 후, 그 '유명한 대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 이게 아빠가 타고 놀다가 여왕님을 만날 뻔했던 그 대포예요? 근데, 아주 작네요! 하하"
왕가의 성을 찾아가는 길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이 마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내 마음속의 추억을 다시 만나는 여정이었다. 현대적인 시골에 둘러싸여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샤켄보르 성은 이 지역의 숨은 보석 같은 곳이다.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은은히 빛나는 보석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한때 이곳에 거주했던 요아킴 왕자가, 이 성을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가는 곳'이라고 말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돌길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바람결에 살랑이는 밀밭과 그 위의 푸른 하늘을 보며 나 또한 마음속에 평온함을 느꼈다. 샤켄보르 성이 품은 그 고요함처럼, 이 평화로운 풍경도 오래도록 변치 않기를 마음속 깊이 기원해 본다.
주소: Schackenborg 1, Møgeltønder DK-6270 Tønder Vat 36034734 Tel: +45 79 30 69 00
샤켄보르 성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사이트를 참고하세요.
https://en.wikipedia.org/wiki/Schackenborg_Castle
성의 내부 사진:https://schackenborg.dk/en/the-castle/the-royal-fam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