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의 팔순 잔치에서 디저트 솜씨를 뽐냈던 타냐는, 남편의 두 살 터울 누나이다. 덴마크는 고등학교 진학 시, 인문 계열(Gymnasium) 또는 상업 계열(Erhvervsskole)을 능력과 적성에 따라 선택한다. 타냐는 제빵사가 되기 위해 직업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혹독한 교육 과정을 마친 뒤, 제빵사의 꿈을 접었다. 이후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하다가 다시 공부해, 지금은 어르신을 돕는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몇 해 전, 오랜 연인이었던 남자 친구와 헤어진 타냐는, 현재 시댁 근처에서 사냥개의 일종인 플랫 코티드 리트리버(Flat Coated Retriever) 두 마리와 살고 있다. 전 남자친구와 함께 입양했던 반려견들이라, 타냐가 집을 비울 때면 여전히 그가 돌봐주곤 한다. 비록 연인 관계는 끝났지만, 좋은 친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작고 아담한 체격의 타냐 역시, 남편처럼 한국인 입양인이다. 유색인종이 없는 이 지역에서 자라온 타냐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탓에, 시부모님도 다녀갔던 한국에 아직 방문한 적이 없다. 아마도 모국 방문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한국 음식을 사랑한다. 특히, 매운 음식을 무척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우리가 덴마크에 갈 때면, 한국에서 식료품은 물론, 옷과 신발, 아기자기한 소품들까지 챙겨간다. 덴마크에서는 잘 맞는 옷이나 신발을 구하기 힘들다며, 그녀는 이런 선물에 늘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타냐는 답례로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곤 했다. 이번에도 한국 음식이 그리워질 즈음, 시부모님과 함께 초대를 받았다. 남편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차로 이동했고, 딸과 나는 5분 정도 거리의 타냐 집으로 걸어갔다. 여름 저녁이었지만, 덴마크의 해는 길어 마치 초가을 오후처럼 밝고 선선했다.
2년 전 이사한 타냐의 집은 혼자 살기에는 조금 크지만, 두 마리의 커다란 개들과 함께라 집이 꽉 찬 느낌이었다. 집안은 작년에 비해 살림이 늘었고, 여느 덴마크인처럼 곳곳에 다양한 의자가 눈에 띄었다. 딸은 타냐의 반려견들을 무척 좋아해서, 셋은 풀밭에서 공놀이를 하며 놀았다. 사냥개들이지만, 잘 훈련되어 있고 사람을 좋아해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
미리 전해 들은 저녁 메뉴는 불고기였다. 요즘 채식을 선호하고 있지만, 덴마크 시골에서 육식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타냐는 다양한 채소와 쌈, 김치까지 준비해 놓고 밥도 직접 지었다. 야외 선룸에는 불판까지 세팅되어 있어, 마치 갈비나 삼겹살을 구워 먹는 듯한 분위기였다. 타냐의 불고기는 어떤 맛일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아, 그런데 양념장에 재워진 고기가 낯설었다.
"타냐, 이건 무슨 고기예요?"
"이건, 우리 애들이 사냥해 온 꿩고기예요. 원래 꿩 자체는 맛이 없는데, 양념이 배면 맛있어요"
음, 꿩고기라! 제주집 밭에서 '꿩꿩'거리며 먹이를 찾던 큰 새들이 떠올랐다. 생전 먹어본 적도 없고, 개들이 직접 사냥해 온 고기라 하니 참 난감했다. 딸은 한국어로 꿩고기는 안 먹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나는 타냐의 정성스러운 상차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옛말에 '꿩대신 닭'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맛보기로 했다. 첫 한 입을 먹어보니, 놀랍게도 익숙한 소불고기 맛이 났다. 딸에게도 맛있다며 권했더니 다행히 몇 점 먹었다.
꿩불고기는 금세 동이 났고, 또 한 번 불판에 고기가 구워졌다. 신선한 채소와 타냐가 직접 만든 피클이 불고기와 잘 어울렸다. 꿩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작은 용기 덕에, 이렇게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밥도 맛있어 칭찬하자, 타냐는 오래전 내가 알려준 방법대로 밥을 지었다고 했다. 순간 가슴이 찡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자란 나보다 한국 음식을 더 잘하는 것 같다.
음식은 단지 먹거리를 넘어서, 그 나라만의 고유한 색과 맛이 고스란히 담긴 문화적 결과물이다. 하지만, 세상이 가까워지면서, 음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퓨전 음식처럼 낯선 재료와 전통 방식이 만나는 새로운 조합은, 이제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다. 이번처럼 불고기의 재료가 소고기가 아닌 꿩고기여도, 여전히 불고기 특유의 맛이 살아 있었다.
어렸을 때 덴마크로 입양된 타냐는 나를 통해 한국 문화를 조금씩 접해 왔다. 누구보다 한국 음식을 사랑하게 된 그녀의 꿩불고기에는 특별한 의미와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재료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불고기 본연의 맛이 살아 있듯, 타냐 역시 국적과 자라난 환경은 다르지만, 그녀 안에 한국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정원에서 잠시 쉬다 거실로 가서 휘겔리한 커피타임을 가졌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에게, 타냐는 초콜릿과 쿠키,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내왔다. 빵을 잘 굽는 타냐에게 딸은 시나몬롤을 배워보고 싶다며 부탁했고, 둘은 약속 날짜를 잡았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벌써 밤 11시가 되었다. 올 때처럼 딸과 나는 걸어서 시댁으로 돌아갔다. 한낮처럼 밝았던 길은 어느새 어둑해졌고 바람은 더 차가워졌지만, 마음만은 따뜻했고 발걸음은 더 가벼웠다.
예로부터 꿩은 한국에서 길조로 인식되었고, 꿩고기는 귀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타냐가 정성껏 대접해 준 꿩불고기는 그녀의 마음까지 대접받은 특별한 음식이었다. 언젠가 타냐가 마음속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짜 한국의 맛과 풍경을 만나러 방문해 주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