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외할머니의 작은 카페' 이야기
지난 글에서 샤켄보르 성을 소개하면서, 잠깐 언급했던 옛 마을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성으로 향하는 돌길을 걷다 보면, 지붕에 짚을 얹은 붉은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뫼겔톤더'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하얀 벽에 초가지붕을 한 작은 집이 제일 눈길을 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마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들이 금방이라도 문을 열어 줄 것 같이 아늑해 보인다.
이곳은 오랫동안 카페로 운영되어 왔고, 지금은 점심에 생선요리와 술을 파는 작은 레스토랑 겸 카페이다. 예쁜 꽃무늬로 장식된 민트색 간판에는 'Mormors lille cafe'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다. '외할머니의 작은 카페'란 뜻이다. 외할머니! 언제 들어도 그립고 애틋한 이름이다.
그 간판을 보면 덴마크의 독특한 호칭 문화가 떠오른다. 할머니는 '베스트모아(bedstemor), 할아버지는 '베스트파아(bedstefar)'로 불리는데, 좀 더 구체적인 방식도 있다. 친할머니는 '파모아(farmor)' 즉, '아빠의 엄마', 외할머니는 '모모아(mormor)'로 '엄마의 엄마'라는 뜻이다. 또한 삼촌이나 이모도 '아빠의 형, 엄마의 언니'처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전통적으로 중산층에서는 '모어파', '파아파'라고 칭하고, 하류층에서는 '베스트모아, 베스트파아'로 통칭했다고 한다. 요즘은 후자가 일반적인데, 우리 딸도 그렇게 부른다. 우연찮게 영어의 '베스트(best)'와 발음이 흡사해 '최고의 할머니, 최고의 할아버지'처럼 들리니 더 정겹다.
사실, 이 카페는 내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2000년대 초, 영국으로 건너가기 전 잠시 덴마크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시어머니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이 카페에서도 일했다. 혼자서 주문받고, 커피와 케이크를 서빙하던 시어머니를 돕고 싶어 나도 함께 일하게 되었다. 당시 카페 이름은 '할머니 카페(Bedstemors cafe)'였다. 친할머니인지 외할머니인지는 모른다.
카페 내부는 외부처럼 하얀색 페인트 칠에, 앤티크 테이블과 의자들이 조화롭게 놓여 있었다. 옛날 집이라 천장이 낮아 아늑했고, 2층에는 디자이너였던 카페 주인의 작업실이 있었다. 당시 주인이었던 요안은 60대의 온화한 인상을 가진 남자로, 캠핑카로 여행을 즐기며 우리에게 친절히 인사해 주곤 했다.
손님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고, 오후가 되면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손님이 뜸해지면, 우리도 낮은 지붕 아래 앉아서 같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 사람들, 덴마크 문화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중 기억에 남는 시어머니의 한마디가 있다.
"오늘 저녁엔 뭘 먹지?"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던 나는, 늘 시어머니가 저녁을 차리면 그저 설거지만 도왔을 뿐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고민 없이 뚝딱 만들어내는 분이라 생각했다. 그런 분도 매일 저녁 메뉴를 걱정한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지금의 나도 저녁마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 세상 모든 엄마들의 공통된 일상인가 보다.
어느 날, 일이 끝나갈 무렵 시어머니가 말했다.
"요안이 이 카페를 팔려고 하네."
"정말요? 괜찮으시면 직접 인수하시는 건 어떠세요?"
그녀가 이곳에서 즐겁게 일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그렇게 말씀드렸다. 잠시 생각하던 시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세금 문제며 서류가 너무 복잡해. 게스트하우스도 있고, 나 혼자 하기에는 버거워."
그때는 시어머니가 '할머니 카페'의 진짜 주인처럼 잘 어울려서 아쉬움이 컸다. 얼마 후, 도회적 외모의 40대 여성이 카페를 인수했고, 맥주를 팔기 시작했다. 그 여주인도 그곳에서 일을 했기에, 나는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맥주 파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새 주인과도 그리 호흡이 잘 맞지 않았는지 결국 일을 접었다.
코로나 이후, 다시 덴마크를 방문했던 어느 날, 우리는 옛 추억도 떠올릴 겸, 그 카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 카페는 다시 새 주인을 맞이했다. 카페 이름도 '외할머니의 작은 카페'로 바뀌어 있었다. 주인은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60대 여성으로 실제 외할머니였다! 그녀는 카페 한쪽 구석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고, 서빙은 다른 가족이 맡고 있었다.
카페 내부로 들어서자, 벽에는 주인의 화사한 풍경화가 가득 걸려 있었고, 모던한 테이블과 의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 옛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져 아쉬웠다. 우리는 정원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생선튀김과 맥주를 즐기며 옛 추억을 나누었다.
길 건너편에는 큰 농장을 개조한 앤티크 샵이 있다. 처음엔 샵만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레스토랑도 겸하고 있었다. 이 지역 기념품과 빈티지, 앤티크 물건들을 팔기에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카페를 지나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은색 지붕의 소박한 뫼겔톤더 교회가 보인다.
교회는 덴마크 전 여왕의 둘째 아들인, 요아킴 왕자의 두 번째 결혼식이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많은 왕실 사람들은 물론, 영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로저 무어까지 방문해서 이 시골 마을이 들썩거렸다. 그 부부의 첫아들 세례식도 이 교회에서 치러져 나름 명소가 되고 있다.
돌길을 따라 늘어선 아기자기한 집들은 붉은 장미 덩굴에 감싸여 있어, 걷는 길도 아름답고 그걸 바라보는 눈도 즐거워진다. 200여 년 전의 세월을 품은 고즈넉한 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면, 복잡한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는 내 딸의 '최고의 할머니'가 되었고, 그 작은 카페는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하지만, 그 낮은 지붕 아래에서 시어머니와의 함께 보냈던 시간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옛날, 시어머니의 고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철없던 나를 떠올리며 웃는다.
'오늘 저녁엔 뭘 먹지?'
Mormors lille cafe 주소: Slotsgaden 9, 6270 Tønder, 덴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