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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May 15. 2024

시골 산책: 길에서 시인을 만나다

제주도 시골 살기 4

 

시골로 이사오기 전에 자주 했던 낭만적인 상상 중 하나는 '시골 산책'이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꼬불꼬불한 작은 시골길에서 이름 모를 들꽃을 보며,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들이키며 상념에 젖은 척 느리게 걷는 산책. 


사실,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존 다이어(John Dyer)의 목가적인 시 <시골 산책>을 읽고 난 후부터 '시골 산책 앓이'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시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골 자연의 품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채 노닐기로 한다. 화가의 눈과 시인의 감성으로 써내려 간 시를 한 줄 한 줄 읽으면, 그 아름다운 시구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그 시골 풍경에서 환희, 그리움, 방황, 행복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들도 느껴진다.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곳이 아파트가 빼곡한 도시였지만, 둘레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서 산책하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정해놓은 산책길을 걷는 것은 운동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고 흥미롭지도 않아서 시골 산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이제 시골로 이사를 왔으니 자주 걸어 다니고 산책 좀 해야겠다 싶었는데... 시골이라 대중교통도 덜하고 버스 정류장도 멀리 있어서 오히려 차를 더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그동안 바쁜 일도 많긴 했지만, 걸어서 동네를 구경하면서 바다까지 걸어가고자 했던 계획은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키려 하는데 덜컥 차가 고장 나 버렸다. 아이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태워 보냈고, 차는 부품을 교환해야 할 상황이라 결국 견인되었다. 연식이 오래된 차지만, 그래도 고장 없이 잘 사용했는데 제주에 와서 탈이 난 모양이었다. 


큰 공업사에 맡겼는데도 도시와 다르게, 항상 부품을 비치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부품을 받아 교체하면 저녁 때나 다음 날에 차를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느리다. 하지만, 답답하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외출할 때마다 차가 필요하지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제주에서 그럴 수 있지라며 이해한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나? 이 상황에 쓰기에는 너무 거창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참에 동네 산책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전 9시경, 바람이 '살랑살랑'하지 않고 '쌀랑쌀랑'하게 분다. 하늘을 보니 '따사로운 햇살'대신 '먹구름'이 끼었다. 비가 올지 몰라 작은 가방에 우산과 물병을 챙겨 넣는다. 바람막이 옷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대문을 나선다. 


조용하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다. 지름길을 통해 바닷가로 갔다가 동네를 한 바퀴를 돌고 와야겠다. 길을 걸으니 새소리가 들리고 이웃집 훈이네 개가 짖는다. 아, 돌담 사이로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찔레꽃이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산에서 놀 때 흔하게 봤던 꽃, 찔리면 아파서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 오래된 추억을 가져다주다니, 너무 반가웠다. 매번 이 길을 지났는데도 차로 다니느라 이제야 본 것이다.





찔레꽃과의 감격적인 해후를 뒤로하고 왼쪽 오솔길을 도니 갓 수확한 마늘밭이 보인다. 세상에나! 마트에서, 깐 마늘을 사다 먹기만 했지 마늘 전체 모습이 이렇게 생긴 줄은, 창피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본 양파와 자뭇 비슷하다.




마늘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방사탑이 보였다. 방사탑 표지판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의 어느 한 방위에서 불길한 징조가 보인다거나 어느 한 지형의 기가 약하거나 부실한 곳에, 기운을 보강하고 부정과 액운을 막으려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쌓아 올린 돌탑으로 보통 바닷가나 하천의 가장자리, 소나무 숲 등에 세워진다"라고 한다.


여기가 바닷가 근처라 이쪽에 탑을 쌓은 것이리라. 마을의 안위를 위해 땀 흘리며 한돌 한돌 탑을 쌓았을 동네 주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제 내가 살 동네이니 이 마을이 무탈하고 잘 되길 방사탑에 빌어 본다.



방사탑을 지나 좀 더 내려가니 노랑꽃이 핀 호박밭이 보인다. 아직 호박은 열리지 않고 꽃만 드문드문 보인다. 어렸을 적, 고향집 담벼락에 할머니께서 호박을 많이 심어 놓으셨다. 호박 덩굴이 담장을 휘감았고 할머니가 호박잎을  따 오라시면 호박꽃을 제 집 드나들 듯하던 꿀벌들을 피해 따다 드렸다. 할머니는 그걸 쪄서 강된장과 함께 쌈밥을 만들어 주셨다. 요리 솜씨가 좋으셨던 할머니는 뭘 만드셔도 항상 맛있었고, 이웃분들과 나눠 드시길 좋아하셔서 동네 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시절이 그립다. 그러고 보면 호박은 씨부터 열매까지 버릴 게 없는 고마운 작물임을 새삼 느낀다.



하늘에는 아직도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신작로를 건너니 광활한 마늘밭이 펼쳐져 있고 한쪽에는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일하시는 분들이 보인다. 캔 마늘을 정리하시는 아주머니께 "올해 작황이 어떤가요?"라고 여쭈니 마늘 알이 작아 안 좋다 하신다. 일 년 고생하셔서 수확하시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상기후로 인해 마늘 농가가 많이 피해를 본 모양이다. 자연재해로 정부에서 사 줄 수도 있다는데 꼭 인정받으시면 좋겠다. 


대화를 하는 중에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줄기를 떼고 주섬주섬 마늘을 챙겨 주신다. 일하는 사람들은 베트남 결혼 이민자의 초청된 가족들이란다. 감귤 수확철에 초청된 베트남 노동자들이 일손이 모자란 농가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수확한 마늘을 밭에 널어 말려야 하는데 도둑맞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속상해하신다. 내가 수도권에 살다 제주로 이사 왔다 하니, 당신 자식들은 서울이 좋다며 서울로 올라갔단다. 그래도 나이 들면 제주로 내려온다고 했다며 애써 서운함을 감추시려 한다. 


마늘을 그만 주셔도 된다고 했는데 어느새 작은 봉지에 가득하다. 마늘 한 알 한 알이 고생하신 농부님들의 송골송골한  땀방울 같아 소중함과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감사하다며 뒤돌아 서는 발걸음이 조금 묵직하다.



조금 내려가니 평소 푸른빛의 바다가 잿빛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다! 자주 보는 바다지만 직접 걸어서 마주치니 나름 반가웠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미리 준비해 온 우산을 편다. 맑은 날의 바다와 비 오는 날의 바다는 사뭇 달라 보인다. 


청명한 날의 바다는 봄날처럼 푸른빛의 밝고 온화하면서 가벼운 느낌이라면 비가 내릴 때는 그런 따스함은 사라지고 늦가을 회색빛의 어둡고 무거우며 심지어 나를 삼킬까 두렵기까지 하다. 하나의 사물이 단순히 날씨 하나 때문에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 많던 바닷새들도 어디에선가 비를 피하고 있겠지.





이젠 반환점을 돌아 신작로가 아닌 꼬불꼬불한 농로를 따라 마을 쪽으로 향했다. 조금 걸어가니 비가 멈추고 하늘이 환해진다. 먹구름 사이로 꽁꽁 숨어 있던 해가 나왔다. 마을에는 새로 지은 모던한 펜션이 여럿 있지만 대부분이 아직도 제주도의 농가주택이거나 개조한 주택들이다. 


낮게 쌓인 돌담 사이로 좁다랗게 나 있는 골목길이 소박하고 정겹다. 창고로 쓰였을 오래된 돌집엔 담쟁이덩굴이 기어오른다. 돌집 뒤로 연보라의 갯무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자전거를 타고 오시는 할아버지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리니, 누군가 하는 얼굴로  "아, 네." 하시면서 낯선 이의 인사를 흔쾌히 받아 주신다. 펜션에 살  때도 클린하우스(재활용센터)에서 마주치는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면 미소로 받아주셨다. 어릴 때는 동네 어르신들만 보면 자동적으로 인사를 드렸는데, 시골에 오니 그 해묵은 버릇을 내 몸이 기억해 낸다.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니 반가운 손님이 날 기다린다. 동네 길고양이다. 나만 반가운 건가? 경계태세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냥이야, 길 생활이 힘들지?" 

길생활의 고단함을 달래는 평온을 방해하는 침입자가 빨리 떠나길 바라는 것 같다. 고양이 간식이라도 챙겨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만나면 간식도 줄게." 

용맹스러운 길냥이가 하루하루 덜 힘들길 바라며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른다. 먹구름이 많이 걷혔고 이젠 바람이 '살랑살랑'분다.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산책길에서, 시공을 초월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 존 다이어를 만났다. 하지만 내가 만난 진정한 길 위의 시인들은 치열한 삶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던 마늘 노동자들과 길고양이가 아니었을까. 


<시골 산책>의 마지막에 시인은 꽤 만족스러운 산책을 마치고, "나 혼자 고독하게 거닐지 않고 클레이오 뮤즈와 함께 길을 걷는 그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읊는다. '기억의 여신' 또는 '역사의 여신'으로 불리는 클레이오 뮤즈와의 산책은 흥미로울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클레이오 뮤즈는 이미 산책길에 나와 동행하고 있었구나! 찔레꽃과 호박덩굴을 보고,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기억의 여신은 끊임없이 내게 옛 추억을 속삭이고 있었던 거다. 산책길에서 안에 웅크리고 있던 시인을 불러내고 있었던 거다. 앞으로도 자주 내 안의 시인을 만나러 가야겠다. 뮤즈는 고사하고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딸내미와 이 길을 걷는 그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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