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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Aug 15. 2024

시골 카페: 자매의 시간을 갖다

제주도 시골 살기 5

한 달간의 긴 장마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이 계속되는 요즘이다. 제주 시골에 첫 집을 마련한 후, 첫 손님으로 용인에 사시는 엄마와 한국 방문 중이던 캐나다 큰언니가 다녀가셨다. 유채꽃이 한창이던 지난 3월이었다. 얼마 전에는 조카들 방학을 맞아 용인에서 셋째 동생네와 막내 동생이 일주일간 다녀갔다. 



호주에 사는 넷째까지, 우리 집은 다섯 자매가 있고 나는 그중 둘째다. 북적거리며 살던 어린 시절에는 돌봐야 할 동생들이 많아 힘들었는데, 지금은 좋은 자매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부모님께 감사하다. 연락은 자주 하지만, 해외에 사는 자매들까지 다섯 명 모두가 모이는 것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5년 전 아버지 장례식 때였으니. 제주도로 이사한 후, 한국에 사는 세 자매가 모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대고 밖에 잠시 나가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라, 최고의 피서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시원한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고양이들과 노는 것이리라. 마당에 나가기 좋아하는 첫째 보리도 한낮에는 나가질 않을 정도니, 이 더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된다.



이렇게 더운 날, 동생네가 우리를 보겠다고 와 준 것이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초중생 아이들 셋과 제대로 구경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염려와는 달리 아이들이 원하는 일정에 맞춰, 바다도 보면서 요령껏 실내 관광위주로 둘러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가 추천한 오일장에도 갔는데, 그 유명한 떡볶이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아 동생네는 무척 실망한 눈치였다. 대신 신선한 과일을 많이 살 수 있어서 좋아했다.



오랜만에 세 자매가 만났지만, 조카들 챙기느라고 바쁜 동생들과 제대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딸내미가 '자매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제안을 했다. 좋은 생각이라 동생네가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 자매들만 모이기로 했다. 일정은 간단했다. 동네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또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은 비빔밥을 주로 하는 한식집이긴 하나, 탕수육과 돈가스도 단품으로 판다. 특히 비빔밥과 같이 먹는, 모자반을 넣은 몸국은 배를 든든히 채워주면서도 맛이 일품이다. 제주가 고향인 셰프님이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음식에 세련미를 더해 재탄생'시킨 국이란다. 이 맛집은 가성비가 좋아 현지인도 많이 찾고 올레길 걷던 관광객도 자주 들러 항상 북적인다.



그날도 점심을 먹기 위해 일부러 서둘러 갔는데도 거의 만석이었다. 나와 셋째는 비빔밥을, 막내는 몸국 고기국수를 주문해서 나눠 먹었다. 풍성한 시골 밥상에 동생들이 맛있다며 잘 먹어준다. 막내 동생이 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해 주문하니, 내가 단골이라며 귤 아이스크림 셋을 서비스로 내온다. 전에 먹었을 때, 약간 쓴맛이 났던 것 같은데, 즐거운 시간이 더해져서 그런지 이번엔 이상하게 달콤한 맛이 났다. 신기했다.


 


<몸국 고기국수가 나오기 전에 사진을 찍어버렸다. 비빔밥과 그 옆에 놓인 몸국>

               


점심을 먹고 간 카페는 전에 가고 싶었던 구옥을 개조한 곳이었다. 제주 농가 주택의 전형적인 특징인 안거리 밖거리로 나누어져 있고, 두 채 모두 카페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젠 구옥 리모델링도 흔한 트렌드가 되었지만, 그래도 모던한 건물의 식당보다는 거의 손대지 않은 예스러움이 묻어나 좋았다. 널찍한 정원에서 풍성하게 자라난 풀도 왠지 카페와 잘 어울렸다.



<세 자매가 머물렀던 '연구자의 응접실'>


동물학자들이 운영한다는 이 카페는 작고 아담해서 편안함을 준다. 동물학자들의 필드스테이션 콘셉트라 더 흥미로웠다. 카페의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 서면, 전면에는 주방이 위치해 있고, 작은 홀 오른쪽에 동물과 환경에 대한 서적과 포스터가 보인다. 카페는 이 주제로 강의와 워크숍,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 시골에 잔잔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양 옆으로 방문이 제거된 작은 방들이 있는데, 각각 연구자의 서재, 연구자의 응접실, 생태예술전시실이라는 이름들이 붙어있다. 전시실에는 제주 돌고래 관련 작은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밖거리는 별채로 사용 중인데 '연구자의 취향'이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고 공간이 넓어서 단체 손님이 이용하면 좋을 듯했다.



학구적 분위기의 '연구자의 서재'가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테이블이 여러 개인 탓에 셋이 오붓하게 이야기하기 좋은 '연구자의 응접실'로 들어갔다. 베이지 바탕에 흑색과 진녹색 문양의 카펫이 깔려있고 모던한 투명 테이블에 오랜만에 보는 옛날 다방의자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세팅되어 있다. 다방에 가 본적은 거의 없지만 지나간 것은 왜 이렇게 그리움만 남기는지 모르겠다. 



점심을 내가 샀으니, 셋째 동생이 음료를 산다고 한다. 시그니쳐 음료인 '산책 라테'를 주문하는데, 제주 도민이라 할인을 받았다! 처음 있는 일이어서 신기하고 감사했다. 기다리는 동안 동생들과 카페를 둘러보는데, 침팬지 연구의 권위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박사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여기 카페 사장님들과 같이 찍은 사진으로 그 밑에는 환대에 감사했다는 구달 박사의 친필 카드도 있었다!



제인 구달의 사진 끝에서 오랑우탄 보호와 연구로 평생을 헌신한 비루테 갈디카스, 그리고 고릴라 보호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다이앤 포시가 오버랩되었다. 이 세 여성은 저명한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의 제자로 영장류 학자 '삼총사'로 불렸다. 구달과 갈디카스는 노년의 나이인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반면,  다이앤 포시는 고릴라 밀렵꾼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53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우리 세 자매는 응접실에 앉아 사진도 찍고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도 풀어냈다. 요즘 근황, 어릴 적 이야기, 아이들 교육 이야기, 빼놓을 수 없는 시댁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 등등. 그렇게 정답게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동안, 카페는 어느새 북새통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골 카페지만,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무료 도슨트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어 설명을 들으려 참가한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문득 세 자매 같은 영장류 삼총사도 생전에 이런 자매의 시간을 같이 보낸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르완다에서 그리고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각자 본인의 연구와 동물 보호에 몰두하느라 이런 시간은 사치였을까? 만났더라도 유인원 이야기만 했을까? 우리처럼 시시콜콜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도 했을까? 



한두 시간만 있으려고 했는데 벌써 세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 사이 사장님들께 미안해 음료를 더 주문하긴 했지만, 이제는 응접실을 비워줘야 할 것 같았다.  조금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 만남의 에너지로 비축해 두기로 한다. 밖은 늦은 오후인데도, 한여름이라 햇빛이 쨍쨍하다.



언젠가 이 시골의 작은 카페에서 다섯 자매가 모두 모여 수다를 떠는 그날을 그려본다. 

그때는 응접실보다 더 넓은 별채가 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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