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별 Oct 07. 2024

제주의 햇빛과 바다

제주도 시골 살기 7

우리 집 1층 거실에는 TV가 없다. 대신 거실을 둘러싼 두 통창이 그야말로 거대한 화면 같다. 당연히  TV처럼 다양한 채널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한쪽은 귤밭을, 다른 한쪽은 콜라비 밭 너머로 서쪽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 이 밭을 사서 높은 건물을 짓지 않는 한, 이 두 개의 화면은 영원히 고정된 채널로 남을 것이다.


어떤 이는 매일 보는 풍경이 질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반복되는 장면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반년 이상을 봐 온 나는 이미 싫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대형 화면에서는 새로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좀 과장하자면 100개 이상의 채널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사 왔을 무렵, 첫 번째 채널은 수확 후 쓸쓸해진 귤밭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더니 5월에는 귤나무가 화려한 흰 꽃을 피웠다. 난생처음 보는 귤꽃이었다. 여름에는 청귤이 열리더니, 이제는 화면 속 귤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고 있다. 가끔 귤밭을 관리하는 조연 배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채널에서는 큰 새가 빈 밭을 가는 트랙터를 졸졸 따라가는 장면이 펼쳐졌다. 알고 보니, 밭을 갈면서 나오는 지렁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쉽게 먹잇감을 찾는 요즘 새가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에는 꿩이 나타나 '퀑퀑'거리며 밭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 소리를 들을 때 '꿩'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장마 후 한참 더울 때는 잠자리들도 많이 날아다녔고, 가끔은 길고양이들이 카메오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매혹적인 장면은 날씨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색이다. 맑은 날 아침에는 푸른 하늘을 꼭 닮은 파란색, 정오쯤에는 연한 하늘색, 오후가 되면 눈부신 햇빛의 반사로 바다는 아름다운 은빛으로 물든다. 그리고 해 질 녘에는 붉은빛을 띠고, 밤이 되면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그때는 바다 위에 떠있는 고깃배들 조명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린다.


하늘과 내 찻잔을 닮은 파란색 바다


햇살이 내리쬐는 은빛 바다

 

해 질 녘 바다, 모네의 <해돋이>를 연상시킨다


해가 진 후의 바다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바다도 우울한 회색빛을 띤다. 멀리서 보면 수평선이 보이지 않아, 마치 바다와 하늘이 하나가 된 것 같다. 이쯤 되니 과학에 문외한인 나도 바닷물은 정말 파란색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든다. 이래저래 찾아보니 "바닷물의 색깔을 결정하는 건 바로 빛"이란다! 나는 이 과학적 사실을 거실에 앉아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다 아는 사소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참 신비로운 경험이다. 이러니 이 경치에 지루할 틈이 없다.



흐린 날의 바다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바다를 보니,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의 <건초더미> 시리즈가 떠오른다. 자연 풍경을 소재로 빛에 따라 변화하는 색감을 잘 포착한 그의 작품은 정말 '인상'적이다. 1890년에서 1891년까지 진행된 연작 <건초더미>에서는 사계절이 지나가고, 하루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중 1890년도 작 <건초더미, Meules>에서 보여주는 석양빛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아련한 그 빛은 아득한 옛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조금은 둔한 내가 바다색의 변화를 눈치챈 건, 아마도 제주에서 경험한 햇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주의 햇빛은 유난히 강렬하다. 도시에 살 때는 경험해보지 못한 날카로운 빛이 직접 내리쬐는 느낌이다. 해 질 녘 장을 보고 집으로 운전해 돌아올 때, 햇빛이 너무 눈부셔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다. 물론 여기는 섬이어서 육지의 도시보다 대기가 덜 오염되어 순수한 햇빛이 그대로 내려올 것이다.


해가 뜨면 낮은 눈부실 정도로 환하고, 해가 지면 밤은 앞을 못 볼정도로 어둡다. 프로메테우스가 우리 인간에게 불을 주기 이전, 인간이 빛을 조절할 수 없었던 태곳적 시절이 아마 이랬을까? 나는 다소곳한 애청자의 모습으로 거실의 두 번째 채널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리고 자연이 조절하는 빛에 따라 바다가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한 제주의 햇빛과 바다. 이곳에 살면서, 몰랐던 그 세계에 점점 빠져들고 친숙해지면서 왠지 모를 그리움이 깊어진다. 마치 내가 그 옛날의 일부였던 것처럼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