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작가를 좋아한다. 정확하게 <맡겨진 소녀>의 킨셀라부부를 좋아한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맡겨진 소녀>를 읽고 클레어 키건을 좋아하게 되었고, 신간이 나왔을 때도 기대가 컸다.
클레어 키건의 문장은 읽는 순간 키건 또는 펄롱의 공간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함께 보고 함께 느끼되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아니 설명하지 않을 때 더 강하게 알게 되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다. 작가의 모든 문장은 다시 읽을 때 더 다가와 그 의미가 또렷해진다.
이 소설은 잔인하게 억압당한 어린 영혼을 위해 쓰였다. 첫 장에서 ‘아일랜드의 모자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친다’는 글로 시작한다. 모자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실제로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에서 18세기에서 20세기말에 걸쳐 수용된 미혼모는 3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1993년에 시신 155구가 암매장된 공동묘지가 발견되었고 학대와 강제입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출처- 위키백과 )
펼쳐든 책은 첫 문단부터 차갑고 어두웠으며 시렸다. 아직 10월인데 나무는 벌써 벌거벗었으며 배로 강은 흑맥주처럼 검었고 사람들은 침울했고 축축했다. 수녀원과 세탁소에서 고통받은 불쌍한 소녀를 가리키는 모든 문장들이 서서히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크게 말하지 않는데 크게 들리는 느낌, 조용한 울림이라고나 할까?
펄롱은 엄마가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했기 때문에 미시즈 윌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만약 미시즈 윌슨이 미혼모라는 이유로 펄롱 엄마를 해고했다면 펄롱의 엄마도 미혼모보호소에서 펄롱을 낳고 그곳에서 고통받았을 것이었다. 아니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펄롱은 석탄과 토탄, 무연탄, 장작을 팔았다. ‘검은 석탄은 가장 더러움을 타는 직업’이었으나 사실 가장 따뜻한 직업이기도 했다. 그는 추위에 떠는 어린아이와 노인과 마을 사람들을 ‘기분 좋게 몸을 녹이‘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펄롱이 하고 있는 일에서 가져온 것 같았다. 석탄을 배달하며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동네 사람 모두에게 친절하고, 어려운 사람을 못 본 척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니를 털어 나누는 사람,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석탄과 장작을 배달해 주는 -이토록 사소한 것들(진짜 중요한 일들)을 하는 - 다섯 아이의 아빠이자 아일린의 남편인 펄롱.
그는 석탄 배달하던 중 수녀원(세탁소)에 만난 형편없는 차림을 하고 바닥을 닦고 있는 여자아이들의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듣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으로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나 아일린을 비롯한 이웃들이 그저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56p) 아이들을 돕고 난 후 수녀원의 저항을 두려워했다. 수녀원은 또 하나의 권력이었기에 쉽게 깨트릴 수 없는 커다란 벽이었다. 그러나 펄롱은 용기를 냈고 깨트릴 수 없다고 믿었던 벽을 마침내 깨트리고 고통받는 소녀를 구했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제목은 미시즈 윌슨에게서 나왔으려나?-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p)’ 하나의 선이 나아가 더 많은 선이 되는 것, 사소한 일이 모여 위대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소녀를 구했다. 구하지 않았을 때 그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두려웠다. 그러나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121p)
맡겨진 소녀에 킨셀라 부부가 있다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는 미시즈 윌슨이 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람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허구라고 했다. 그러나 어딘가에 펄롱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용기가 이 세상을 살만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