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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Dec 15. 2022

[D+68] 창의적으로 비가 내리는 도시

미국, 시애틀

이번 여행에서 신기하게도 어느 집을 가건 잠 하나는 끝내주게 잘 자는 나. 


한국에선 불면+아침잠 없어짐,으로 인해 하루 5시간 정도 잤던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쩔 땐 저녁 7시부터 졸릴 때가 있다. 타코마에서부터 일몰 시간이 4시 반 정도다 보니 저녁을 먹는 시간도 빨라지고 그래서 밤 시간이 물리적으로 길어졌다. 인터넷 검색을 좀 하고 하루의 일기를 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졸고 있고 그대로 자버려 눈을 뜨면 아침이다. 


그렇게 개운하게 일어나 시애틀에서 맞는 비 오는 첫 주말 아침. 어차피 여행자에게 주말과 평일의 개념은 무의미하지만 다운타운 나가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더 이상 잔돈도 없어서 동네 산책이나 하자 싶었다. '레이크 워싱턴'이 걸어서 얼마 되지 않고 산책길이 아주 잘 되어 있다는 크리스틴의 추천으로 집을 나섰다. 


3시간 정도 걷는 동안 이 빗속에 우산을 쓴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산책을 하다 딱 2종류의 사람들만 만났는데,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과 반팔&쫄바지 입고 조깅하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을 만큼 비에 젖었는데 우산은 없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다.


레이크 워싱턴 주변 산책. 호수가 너무 커서 산책으로 한 바퀴 도는 건 불가능


비에 젖은 낙엽들에서 빛이 난다


산책을 하다 발견한 공유 텃밭


주말 아침은 브런치지요




크리스틴의 집에는 총 세 종류의 삶이 있다. 2층엔 크리스틴이 살고 지하엔 그녀의 25살 먹은 딸네 부부가, 1층엔 이 집에 입양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젊은 총각 니콜라이가 산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찌어찌하여 자기네 가족들과 크리스틴이 다 아는 사이가 되었고 자신이 시애틀에 정착하려고 했을 때 방 하나를 내어주며 엄마처럼 돌봐주니 거의 이 집에 입양이 된 걸로 봐야 한다나.


크리스틴의 이런 오지랖이 태평양 수준인 걸 알게 된 건 옆집 개 '무스' 때문이다. 산책에서 돌아와 거실에서 윈스턴과 놀고 있자니 무스를 산책시키러 공원을 갈 건데 함께 가자는 크리스틴. 고양이파 집사가 이젠 하다하다 개 산책까지 해보는 경험을 한다.


덩치가 엄청난 4살짜리 리트리버 무스는, 크리스틴의 말에 따르면 주인이 산책이나 놀이를 거의 해주지 않아 자신이 하루에 두 번씩 공원엘 데려간단다. 무스를 산책시키지 못하는 날에는 잠도 오지 않을 정도라니 이 아줌마 참으로 대단하다.


이 비 오는 날, 차로 10분여를 달려 도착한 공원에서 정말 글자 그대로 '미친개' 마냥 달리는 무스를 보고 있자니 얘는 모르긴 몰라도 아마 크리스틴이 제 주인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공을 쉽게 던져주는 장난감을 한 손에 쥐고 캠핑 의자를 가져와 앉아서 날이 좋으면 온라인 퍼즐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크리스틴. 


너무 신이 난 무스는 물고 온 공을 내 앞에 내려놓고 얌전히 기다리...지 않았다. 딴에는 빨리 던지라는 재촉을 하느라 그랬겠지만 그 큰 덩치로 뛰어올라, 내 유일한 패딩이고 청바지고 운동화를 온통 진흙 범벅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 단벌이란 말이다, 이 놈아! 


달릴 준비 중인 무스


자신의 혀를 깨물어 피가 나는데도 아랑곳없다


세상 신난 미친개


벌렁거리는 분홍 코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무스


남의 집 개에게 이런 정성이라니




집으로 돌아와 니콜라이와 저녁을 함께 먹다 내가 물었다.


 - 미국 사람들 대부분은 왜 우산을 안 쓰고 다녀?

 - 대부분 아니고 여기 서부 해안 쪽만 그럴 걸?

 - 그럼 더 이상하지. 이 동네는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하잖아

 - 많이 온다기보다 자주 오는 건데 여긴 비의 특징이 좀 남달라. 비가 똑바로 내리지 않고 사방팔방 창의적 방향에서 오거든. 그래서 우산을 쓰는 의미가 없어


오~ 참으로 신박한 이론일세. 

팩트를 떠나 나름 그럴듯해서 한참을 웃었다. 


그림일기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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