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
여행을 온 나는, 왜 아침형 인간이 되었는가.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어느 도시를 가건 그냥 그곳의 시차에 저절로 맞춰지는 몸의 리듬이다,라고 하기엔 내가 아침형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몸의 리듬대로라면(시차와 상관없이) 새벽 늦게 잠들고 해가 중천에 뜨고 난 뒤에야 일어나야 한다.
출근이라도 해야 한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이 무계획 백수 여행자의 바이오리듬이 이렇다 보니 아주 죽겠다.
오늘도 어제 비와의 사투를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나의 옷들을 빨기 위해 세탁기 사용법을 물어야 하는데 호스트 두 사람 모두 오후 1시가 되도록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결국 운동화만 물에 헹궈내 빨랫줄에 걸고 옷들은 방 한쪽 구석에 비닐을 깔고 쌓아뒀다. 썩기야 하겠어.
그래서 오늘은 호스트들이 일어날 때까지 안토니오와 놀기로 했다. 안토니오는, 이자벨의 친구네 고양이가 낳은 8마리의 새끼 고양이들 중 가장 체구도 작고 연약해 보여 안쓰러운 마음에 입양을 했다고 했다. 크리스티나의 고양이 우마는 뱅갈 믹스로 에너지가 철철 넘쳐, 본의 아니게 안토니오를 많이 괴롭혔다고 하는데 하악질 한번 하지 않고 잘 받아줬다고 했다.
사실 안토니오를 매일 방으로 불러 물고 빨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포르투의 루아 때문이었다.
포르투에 도착하고 삼일 째 되던 날, 루아가 내(가 아닌 지인의) 배낭에 오줌 테러를 저질렀던 것. 우리 집 두 냥이들을 비롯해 모시모시의 냄새도 묻어 있었을 테니 까칠이 루아 입장에서는 '뭐야? 이거?' 했을 거다. 당황한 플라우시나가 락스며 냄새 제거제며 한 통 다 쓰라고 줬지만 루아 지지배의 오줌 냄새는 강력했다.
리스본으로 오고 첫날 코인 빨래방에서 배낭을 빨았었다. 내 입장에선 더 이상 냄새가 안 났지만 아무리 조용하고 얌전한 안토니오라 해도 본능은 어쩔 수 없을 테니 또 한 번의 오줌 테러를 당하는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늘 내 방문을 닫고 다녔었다.
그러다 오늘 호스트들이 나오길 기다리다 '너도 심심하지 않니?' 하며 처음으로 안토니오를 내 방에 초대했다. 침대 위에서 안토니오의 특기인 꾹꾹이+쭙쭙이 2단 콤보를 마음껏 구경하며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고 있자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안토니오와 함께 깜빡 잠이 들었다가 방문 밖의 예사롭지 않은 소리에 눈을 떴다. 두 사람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아니라 가구들이 움직이는 뭔가 엄청난 소리. 알고 보니 그림 작업을 모두 끝낸 크리스티나가 이자벨과 함께 '가을맞이 가구 재배치' 삼매경이었다. 크리스티나의 딸 '살로메' 감독이 오늘 저녁을 먹으러 올 예정이라 집안 대청소 겸 정리 중이라 했다.
도와줄까, 했으나 가구 옮기는 게 취미라는 크리스티나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빨래나 하자 싶어 이자벨에게 세탁기 돌리는 법을 알려달라니 옷을 주면 자기가 빨아주겠다고 한다. 플라우시나의 집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빨랫줄이 모두 도르래로 움직이는 게 신기해서 이자벨의 도움을 받아 내가 직접 널어 보았다.
빨래를 함께 널면서 시작된 나의 하소연.
- 전망대를 올라가 볼까 하는데 여기 오르막길은 너무 힘들고 트램은 사람이 너무 많아
- 어느 전망대?
- 성 조지 전망대 말이야
- 아, 거긴 내 산책 코스기도 한데 엘리베이터만 잘 연결해서 타면 금세 올라갈 수 있어
- 뭐라고?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정말 동네 주민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꿀팁이 얻어걸렸다. 언덕길 중간중간에 있는 건물들의 엘리베이터를 잘 활용하면 약 12층 높이를 힘 하나 안 들이고 올라갈 수 있었던 거다.
전망대도 가고 저녁도 먹을 겸 신이 나서 집을 나섰다. 성 조지 전망대를 입장하려면 10유로나 내야 하는데 마지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다본 전망도 나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살로메 감독이 와 있다.
- 너 영화제에서 일한다며?
- 응, 만나서 영광이야. 베를린 포럼 영상 봤어. 멋지더라
- 베를린은 뭐, 한 세 번쯤 초청받고 갔었지. 한국은 한 번도 간 적 없지만 전주영화제는 들어봤어
- 한국에서 제일 큰 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지
- 아, 부산도 들어본 거 같다
- 네 영화, 언젠가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음 좋겠다
- 그럼 너무 좋지!
가족들끼리의 식사 자리라 긴 얘기를 나누진 못했으나, 그녀의 눈에선 총기가 반짝반짝. 비범한 예술가 타입이 분명하다.
내일은 다시 관광객 모드 장착하고 오비두스로 향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