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8] 야니 투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by 므스므

체력이 바닥까진 아니어도 금세 피곤해지는 걸 보니 누적 피로도가 있긴 하구나 싶은 아침이었다. 게다가 눈을 뜨며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닫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프리카도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우울이 나를 잡아먹게 할 순 없지. 그래서 커피 한 잔과 함께 남은 3일간 무엇에 선택과 집중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야니가 나를 부른다.


좀 있다 '채프만스 픽'으로 드라이브를 갈 건데 생각이 있냐고 묻길래, 따지고 잴 게 무어란 말인가 싶어 어딘지도 모르면서 냉큼 따라나섰다. 이 언니, 가볍게 드라이브나 하자 해놓고 투철한 가이드로 돌변하더니 해변에서 커피 트럭을 두고 장사하는 아저씨의 모닝커피를 시작으로 뷰가 좋은 곳마다 차를 세우고, 여행 가이드 어디에도 없을 법한 로컬 시장과 항구 등등을 들러 나에게 사진 찍을 타임까지 준다.


기아 쏘울이 야니의 애마였다. 자, 야니 투어 출발~

야니 투어 1. 대서양 앞바다를 뷰로 가진 커피 트럭


야니 투어 2. 야니의 뒷모습을 찍었는데 엘사 공주님인 줄


야니 투어 3. 하늘과 모래 색깔 좀 보소


야니 투어 4. 항구에 있는 로컬 시장


야니 투어 5. 식당과 소품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던 정체불명의 공간


급기야 자신만의 비밀 스팟이 있다며 그곳으로 신이 나서 나를 인도한다. 문제는 이곳이 프라이빗 해변이라 입구 쪽에 가드 초소가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가드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50랜드를 내미는 야니. 그러자 차단봉이 휙 하고 올라간다. 의기양양한 야니 왈, 웰컴 투 사우스 아프리카.


약 30년 전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안가에 배를 정박한 뒤 인양을 거절한 선장으로 인해, 현재 배의 대부분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고 돛대로 추정되는 끝부분도 녹이 슬며 조금씩 묻혀가고 있는 곳. 지구가 아닌 우주 어딘가의 행성에 와 있는 기분이다.


야니 투어 6. 야니의 시크릿 해변


야니 투어 6. 사실은 난파된 우주선이 아닐까


야니 투어 6. 야니가 해변에서 득템한 투명 유리구

야니가 해변으로 올라온 쓰레기들 사이에서 투명 유리구를 발견하고는 득템했다 좋아라 한다. 그렇게 둘이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하염없이 걷다 문득 야니가 물었다. 형제가 있냐고.


응,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

근데 오늘이 그 애 기일이야...


아침부터 우울해 있던 이유였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긴 얘기를 풀어놓았다. 나도 몰랐는데 이 여행의 출발이 그 애로부터였다는 걸 남들에게 얘기하는 순간 문득문득 깨닫는다. 얘기를 끝내고 해변 끝머리에 앉아 파도들이 왔다가 부서져버리는 걸 무심히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야니가 벌떡 일어난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침에 출발하며 점심은 내가 낼 테니 절대로 나랑 싸울 생각 말라고 했었는데 배려심 돋는 야니가 동네 주민들만 갈 법한, 그래서 아주 저렴해 보이는 로컬 식당으로 안내한다. 아침엔 대서양 앞바다를 보면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점심엔 식당 앞 방파제에서 부서지는 인도양의 어마 무시한 파도들을 보며 밥을 먹다니. 진짜 뭔가 어마어마하다, 케이프타운은.


야니 투어 7. 인도양의 파도를 그대로 맞고 서 있는 식당 스케일 좀 보소


야니 투어 7. 식당 내부와 우리의 점심


한국도 동쪽 해안에 이곳과 비슷한 지형이 있다고, 네가 한국에 온다면 꼭 데려가겠다고 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야니. 오늘도 말의 힘을 믿어보자.


짧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야니 투어가 아침 8시에 시작해 오후 3시가 넘어 끝났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그녀가 나의 호스트라서, 나의 친구가 되어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나 항개도 안 우울함. 걱정들 마시게나.




오늘의 걸캣과 보이캣

지못미, 걸캣!


낮 시간엔 좀처럼 집에 없는 보이캣인데, 어젯밤 과음하신 듯


그나저나 우리 아들놈 노랭이가 자꾸 살이 찌는 것 같다고, 걱정이 태산이신 임시 집사님. 약간 놀려먹을 요량으로 톡을 보냈더니 이걸 다큐로 받으셔서... 한참을 웃었다.


애들을 엄마보다 더 옥이야 금이야 키워주고 계시는 임시 집사님


그림일기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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