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0] 아프리카의 마지막 날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by 므스므

이제 내일이면 아프리카를 떠나 이번 나의 여행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게 될 미국 입성이다.


뉴욕으로 들어가 시카고를 거쳐 포틀랜드와 시애틀, 라스베이거스까지 약 50일가량 있을 예정인데, 내가 경험한 최악의 서양인은 덴마크 애들이었지만 다수의 안 좋은 기억들은 모조리 미국인들로부터다. 그들이 쓰는 배려심 없는 영어도 스트레스다. 이번엔 어떤 호스트들과 어떤 상황들을 만나게 될는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또다시 '아몰랑 폴더' 가동.


매일 아침 루틴이 되어버린, 테이블 마운틴 영접 + 커피 마시기 + 걸캣 쓰다듬기 의식을 하며(심호흡 추가) 마음을 다잡았다. 해보고 싶었던 일들, 가보고 싶었던 곳들, 얼추 다 이루었는데 마지막 날인 오늘은 무얼 하며 보낼까 고민 중이었다.


아침부터 뭔가로 분주하게 집 안팎을 오가던 야니가 테라스로 나왔다. 그러더니 테라스 한편에 두었던 양동이 속에서 밧줄을 꺼내 가방에 묶더니 건물 밖으로 휙 던지는 게 아닌가! 응?? 여기 3층인데??


알고 보니 장을 보고 온 물건들을 집으로 올려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보니 매번 이런 방식으로 짐을 올린다고, 자기가 발명한(?) 거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야니. 야니도 가사도우미를 쓰는지, 건물 아래에선 어떤 흑인 아줌마가 연신 가방을 받아 짐을 채우고 있었다.


기계공학 전공자의 재능 낭비 현장


한바탕 푸하하 웃고 났더니 야니가 이번엔, 네가 정말 좋아할 것 같은 주말 마켓이 열리는데 같이 가자고 한다.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테이블 마운틴은 영험한 힘이 있어. 응?


내 취향을 완벽히 파악한 야니. 평범한 로컬 마켓을 기대했는데 이건 힙 그 자체다. 시장 구경은 언제나 내 여행의 필수 코스인데 이곳은 시장이라 부르면 안 되고 꼭 '마켓'이라고 불러줘야 할 것만 같다.


먹거리들이 신선하니 그 색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그것들을 쌓아놓고 펼쳐놓은 상인들의 데코레이션 솜씨에도 입이 벌어졌다. 먹거리뿐만이 아니다. 각종 핸드메이드 소품들은 왜 또 하나같이 예쁘고 아프리카스러운가. 아프리카스럽다는 얘기는 기념품으로 딱이라는 얘기인데.


마켓전경.png 주말마다 이런 곳에 갈 수 있다니 넘나 부러운 것


마켓1.png 어쩜 이렇게 사고 싶게끔 데코를 해놨을까


마켓2.png 먹거리뿐만 아니라 각종 식물들과 그릇, 소품들까지


마켓3.png 다 이뻐, 다 좋아


마켓4.png 여행 첫날 왔으면 싸그리 다 샀을 거야


마켓5.png 천막 내부를 온통 버섯 냄새로 가득 채우던 꼬치구이


그중에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내 취향을 저격하는 큼지막한 숄더백이 있어 정말 백만 번을 만지작거렸다. 심지어 왔던 길을 다시 가며 두 번을 들르기도 했다. 하지만 물건들이 좋은 만큼 가격대가 좀 있다 보니 지름신이 오기엔 뭔가 부족하다. 게다가 사파리에서의 반성 + 배낭 무게가 결정적 역할을 해버렸다. 어떻게 줄인 배낭인데.


마켓을 나오면서도 엉엉거리고 있자니, 야니가 자신의 지갑에서 가방값의 1/3이나 되는 돈을 꺼내 건네준다. 이 심성 고운 아줌마를 우얄꼬. 내가 오늘 이 가방을 사지 못한 이유는, 아마 내일 아침 내 배낭을 들어 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야니가 어제 차가 너무 막히고 사람이 미어터질 만큼 많아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해변을 그냥 스쳐지나갔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곤 그곳으로 차를 몬다. 다시 보고 또 봐도 케이프타운의 바다는 내 인생 최고의 바다다.


평온한 바다도 좋구나


케이프타운의 바다에선 색색깔의 젤리도 자란다




오후엔 어제 실패했던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의 마부 레코드샵에 다시 도전했다. 다행히 가게문은 열려 있었고 주인인 듯한 남자가 친절하게 말을 건다. 영화에 등장했던 가게 주인 스티븐은 작년에 은퇴를 했고 가게는 롱스트리트(서울의 가로수길 정도)의 더 넓은 매장으로 이전을 한 거라고, 묻지 않았는데도 친절히 알려준다.


이 남자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원래 이 샵을 오픈한 사람인데 3년 정도 후에 스티븐과 동업을 시작했고 '마부'라는 이름은 중국 무술 자세의 일종이고 로고 역시 본인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로고가 중국어로 하늘 천 자를 닮았다고 하니 극구 아니라며, 마부를 선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살짝 믿거나 말거나 식의 '자기 자랑'이라 대충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마부2.png 로고가 아무리 봐도 하늘 천인데, 결코 아니라니 뭐


마부1.png 영화에서처럼 나도 슈가맨(앨범)을 찾아다녔으나 실패. 그의 흔적만이라도 감격


내가 이곳에 온 건 로드리게즈의 앨범을 사 가려고 한 건데, 주로 빈티지로 패킹되어 나오는 그의 앨범은 가격이 엄청 비쌈에도 불구하고 들여놓기가 무섭게 나가는지라 현재는 솔드 아웃이고 주문을 넣어놨으니 조만간 미국에서 도착할 거란다.


아쉬웠지만 그럼 아프리칸 뮤지션으로 하나 추천을 해달고 하니 '슈가맨'을 커버한 어떤 그룹의 CD를 찾아준다.


야니에게 보여주니 자기도 너무나 좋아하는 그룹이라는데, 들어보니 원곡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내 맘에도 쏙 든다. 야니가 가진 로드리게즈 앨범 모두를 들으며 우리는 마지막 저녁을 함께 했다. 케이프타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지금 케이프타운에는 거의 태풍급 바람이 부는데 소리가 어마어마하다. 창 밖을 보며 내일 비행기가 뜰까 걱정된다니 야니 왈,


- 에이~ 봄바람 가지고 뭘 그래?


그녀의 유머가 정말 정말 그리울 거다.


그림40.jpg 그림일기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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