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고양이를 싫어하면 오지 말 것"
뉴욕의 호스트 다니엘이 자신의 집을 예약할 때 참고하라며 적어놓은 협박 아닌 협박이다. 다른 호스트들에 비해 유난히도 'no'와 'not'을 잔뜩 적어놓은 탓에, 아무리 내가 고양이 러버라도 좀 망설여진 게 사실이었다. 안되고, 하지 말라는 것이 뭐가 그리 많은지.
요구사항은 대부분 상식선의 것들이었지만 누구는 상식이기 때문에 소개글에 아예 적지 않는 것들을, 이런 상식마저 없는 사람은 내 집에 올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그녀가 좀 무서웠다.
하지만 뉴욕이라는 물가 강도의 도시에서 이 정도로 싼 금액의 숙소가 없어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여행지에서의 '쉼'을 잠시 내려놓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숙소에 머물 시간이 별로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긴 뉴욕이 아니던가.
하지만 인생이 어디 내 맘대로 흘러가나. 쌀쌀해진 날씨 탓에 방안 온도를 올려주던 유일한 수단인 팬히터는 고질병인 천식을 불러왔고 투어 버스를 기다리느라 부슬비가 내리는 밤거리에서 1시간가량을 떨었더니 덜컥 감기까지 걸려버렸다.
덕분에 워킹맘이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던 다니엘 대신 브라질에서 이민 와 이제는 은퇴를 한 그녀의 부모님과 자주 마주쳤다. 영성체를 앞두고 있는 다니엘의 아기 '마키엘라' 앞으로 온 선물들이 소파를 비롯해 거실 전체를 점령한 상태였는데 밤마다 다니엘이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지만 내가 떠나는 날까지도 거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바쁜 엄마 대신 아기 마키엘라의 밥, 잠, 기저귀는 할아버지의 몫이었고 가족들의 식사는 할머니 몫이었다. 그녀가 구운 오가닉 당근 케이크를 얻어먹고는(너무 맛있어서 염치 불고하고 하나 더 달라고 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냐 물었더니 '핀터레스트에서 본 레시피'라고 쿨하게 답하는 뉴요커 할머니.
살인적인 물가의 도시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갓난쟁이 하나와 고양이 2마리, 강아지 3마리(한 마리는 전남편이 버리고 간 강아지라고)를 책임지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문득 그녀가 숙소 소개글에 쓴, 상식선에서의 요구사항은 이 집에선 반드시 약속받아야 할 것들임을 깨달았다.
인생을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은 남들 눈엔 얼핏 까탈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존중해 주어야 한다.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내는, 자기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 얘기다.
우버에서 내리자마자 내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오는 고양이 한 마리. 한쪽 귀 끝은 쥐가 파먹은 듯 잘려있고(TNR 이라기엔 심하게 울퉁불퉁) 아랫니 하나는 빠져있는,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보이는 영락없는 길고양이였다. 너무 심하게 아는 척을 하며 뒹굴거리길래 무슨 길고양이가 이럴까, 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호스트 다니엘과 인사를 하는 순간에도 그놈은 내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역시나. 이 집 고양이, '샘슨'이었다. 그리고 친화력 갑인 샘슨조차 무서워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이 집의 터줏대감 17살 '베베'. 베베 역시 외출냥이였지만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만 보낸다고 했다.
올블랙 베베는 내가 주는 간식 덕분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아니 온몸으로 표현해주는 고양이였다. 늘 내 겨드랑이를 파고 들어와 잠을 잤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라치면 다리 위로 올라와 나를 쳐다보곤 했다. 심한 감기와 천식 덕에, 공기를 무서울 정도로 건조하게 만드는 팬히터를 끌 수밖에 없었는데 매일 밤 따뜻한 털뭉치 하나를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베베는 나를 샘슨과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간식도 먹고 싶고 나랑도 놀고 싶어 늘 방문 앞에서 5분 대기조를 하는 샘슨에게, 베베는 하악질을 하기 일쑤였다. 열린 방문 틈으로 빼꼼히 쳐다보고 있는 샘슨이 안쓰러워 어떤 날은 베베를 내 방에 가둬(!) 두고 거실에서 한 시간 가량을 놀아 주기도 했다.
새벽 비행기를 타야 해서 식구들과 마지막 인사조차 못하고 다니엘의 집을 떠나던 날, 짐을 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베베는 내 다리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조만간 이 방에 올 다른 게스트가 이 사랑 넘치는 고양이 베베를, 장난꾸러기 샘슨을, 한 번이라도 친절하게 쓰다듬어 주기를.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