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가 도착하기 며칠 전 남자 친구인 패디가 자길 버리고 그리스로 도망갔다는 농담으로 첫 인사를 대신하는 호스트 야니와, 난 바로 사랑에 빠졌다. 실은 고양이들과 다른 숙소들을 챙겨야 해서 남자 친구 혼자 휴가를 간 것이란다. 나와 유머 코드도 비슷했고 취미도 생각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야옹이들에 대한 우리 둘의 작명 실력이 찰떡궁합이었으니.
나의 고양이 '노랭이와 깜장이'
그녀의 고양이 '걸캣과 보이캣'
이 얼마나 놀랍고 직관적인 작명법인가!
둘 다 산책냥이긴 해도 걸캣은 집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보이캣은 새벽에 화장실을 가다가 소파에서 자는 걸 잠깐 볼뿐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집 밖에서 무척이나 공사가 다망한 고양이였다. 걸캣은 싫고 좋은 게 분명해서 자기 좋을 땐 어마 무시한 개냥이가 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매일 밤 나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간식이 숨겨진 내 배낭에 대한 애착)을 주체 못 하고 엄마가 아무리 불러도 내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만난 고양이들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걸캣
늘 집 밖 일로 공사가 다망하셨던 보이캣
테이블 마운틴을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야니네 테라스에서 커피 한잔과 함께 산 위로 흘러가는 구름의 모습에 홀려있다 보면, 언제나 걸캣이 조용히 다가와 테이블 혹은 내 무릎에 올라와 앉았다. 케이프타운의 미세먼지 1도 없는 청명한 공기와 선선한 바람,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습, 그리고 나를 지긋이 올려다보는 걸캣이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정말 좋았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리 좋은 걸, 싶다.
그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오늘이 며칠인지를 깨닫고 기분이 무척이나 가라앉은 터였다. 테라스에 앉아 유독 오랫동안 테이블 마운틴을 넋 놓고 보고 있자니 야니가 나를 부른다. '죽이는 바다 풍경을 앞마당으로 가진 맛있는 커피 가게'를 아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광대한 바다 전경 뷰를 가진 멋진 카페를 예상했더니 아뿔싸, 야니의 유머감각을 간과했다. 대서양의 거대한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 한편에 오도코니 서 있는 조그만 '커피 트럭'. 이런. 참으로 매력적인 아가씨다.
광활한 대서양을 앞마당으로 가진 뷰맛집 커피 트럭
이왕 이렇게 나온 거 자기만의 시크릿 스폿을 보여주겠다는 야니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리하여 모닝커피는 대서양에서, 점심 식사는 인도양에서 하게 된 스케일이 다른 '야니 투어'가 시작되었다.
야니만의 비밀 장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프라이빗 해변에 위치해 있었다. 해변 초입의 초소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가드와 몇 마디 주고받던 야니는 50 랜드를 내밀었고, 차단봉은 올라갔다. 야니 왈, 웰컴 투 사우스 아프리카!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가짜 같은 내 진짜 이야기를 했다
30여 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안가에 배를 정박한 뒤 인양을 거절한 선장으로 인해 현재 배의 대부분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는 곳. 배의 돛대와 구조물로 추정되는 일부분만이 녹슨 채 보일 뿐, 지금도 조금씩 묻혀가고 있는 곳. 영화 <매드 맥스> 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게 해변을 조용히 걷다가 야니가 물었다. 형제가 있냐고.
응. 2살 어린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
근데 오늘이 그 애 기일이야.
그리고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보다 더 못한 남으로 살던 우리 자매가 고양이로 인해 대화를 시작했고 그렇게 진짜 자매가 되어가는가 하던 순간, 그 아이가 떠났다는 가짜 같은 이야기. 생각해보면 이 여행의 진짜 시작점은 그 애로부터였다는 걸 문득문득 떠올린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아이가 떠난 지 5년이 되던 날이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거대한 굉음을 내며 쉼 없이 부서지는 대서양의 파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앉았는 나를, 야니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