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인 물가로 악명 높은 북유럽을, 내 여행 일정에 넣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을 하다가 '맛만 보자'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스톡홀름을 찍었다. 단 4일을 말이다. 그런데 여러모로 가장 씁쓸한 기억을 남긴 여행지가 되었으니.
호스트인 브리깃타는 올 1월에 은퇴한, 발달장애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깐깐의 포스'가 얼굴에서 넘쳐흘렀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 안에서 지켜야 할 룰들이 정말 많았다.
쓰레기 분리수거야 당연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설거지 끝낸 그릇들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조심해야 했고 자신의 사적 영역을 존중해 달라며 현관 바로 옆 내 방에서 거실이 시작되는 복도까지만 다니길 요청받았다. 즉, 자신의 거실엔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이 할머니, 평생 선생님으로 살아와서 일까. 공항을 좀 더 쉽게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단박에 (종이) 지도를 꺼내와 '밑줄 쫘악' 강의를 하신다. 내가 하는 말을 중간에 끊는 건 다반사고 자기가 글을 쓰면 여길 쳐다보라고 펜을 톡톡 쳤다. 모자란 학생을 가르치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데 '와, 4일도 길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4일이 길게 느껴진 이유는 또 있었다. 9월 말의 북유럽 날씨는 스산함을 넘어 뼛 속까지 으스스함이 들어찼는데 하필이면 내가 도착한 날 히터가 고장 났단다. 유일하게 난방이 들어오던 화장실에서 남은 날을 버텨볼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집안과 밖의 온도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브리깃타가 외투를 바리바리 챙겨 입기에 외출하냐,라고 물었더니 자기도 추워서라고. 북유럽 태생인 그녀조차 이랬으니 어느 정도의 추위였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 집에 사는 고양이는 어땠을까?
'코시니렉스' 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품종묘 '엘라'는, 이름처럼 엘라스틴(!)을 한 듯한 부드러운 곱슬 털을 자랑하는 우아미 넘치는 고양이였다.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돈을 주고 사 왔다, 라는 엘라와의 묘연도 역시나 맘에 안 든다. 고양이가 무슨 죄가 있겠냐만은 엘라는 낯가림도 심하고 나에겐 금지구역이었던 거실을 벗어나지 않아 한번 만져보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알레르기가 심한 고양이라 아무 사료나 간식을 먹지 못한다는 말에, 포르투갈에서부터 바리바리 싸들고 온 조공용 간식들은 가방에서 꺼낼 수 조차 없었다. 스톡홀름에서의 4일은 이래저래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할 만큼 우울했다.
엘라스틴을 한 듯, 너무나 부드러운 곱슬 털을 가진 엘라
그러다 마지막 날,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거실 소파에 있던 엘라를 부르고 있었더니(나도 참 끈질기다!) 방에 있던 브리깃타가 나와서 웬일로 거실 테이블까지 와 앉으라고 한다. 내 손등의 냄새를 먼저 맡게 하면서 엘라를 기다리니 '너 고양이 좀 아는구나' 하며 웃는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웃는 낯이었다. 엘라가 날 좋아하는 거 같다며, 예상치 못하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네가 나의 마지막 게스트일 거야. 은퇴하고 여름 내내 집을 리노베이션 했는데 힘들어서 좀 쉬고 있거든. 하필이면 지금 히타가 말썽을 부려서 미안해. 몸이 힘드니깐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것도 신경이 많이 쓰이고 하네. 도시에 사는 스웨덴 사람들은 근교에 코티지(별장이라기엔 좀 거창하고 주말마다 힐링을 위해 찾는 작은 시골집 같은 개념)가 하나씩은 있는데 나도 일주일에 며칠씩은 들러서 정원을 가꿔. 스웨덴인들에겐 일상이지. 이젠 나도 나 자신에게 집중해 보려 해. 난 너무 쉼 없이 달려왔거든."
생각해 보면 브리깃타는 내가 영화 쪽 일을 한다는 얘길 듣고는 저녁마다 관련이 있을만한 여러 전시나 관광지 정보를 넘칠 만큼 줬고 아침이 되면 또 새로운 곳을 추가해 알려줬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열정 넘치는 선생님이었고 아마 평생을 이렇게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다 은퇴를 하면서 갑자기 인생이 공허해진 것은 아닐까. '인생 치열하게 살기'라는 대회가 있다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나였기에 그녀의 말들이 큰 공감으로 다가왔다. 결국 나에게만 온전히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통해 내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치열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내 마음엔 빈 공간이 생길 테고 그곳을 다른 것으로 채울 여유가 생길 테니깐.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은 내려놓는 연습이 우선이다. 무엇을 채워 넣을지는 다음 스탭이다.
은퇴 후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집 꾸미기에 집중했던 그녀나, 남들 못하는 세계 여행을 떠났는데 뭐라도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고 자신을 닦달했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젠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그냥 머리를 비우는 것이 최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