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인 크리스티나와 평화주의냥 안토니오

포르투갈, 리스본

by 므스므

리스본에서의 호스트 크리스티나는 화가였다.


내가 도착하던 날은 조만간 있을 전시회 준비로 너무 바쁜 나머지 집안을 소개하고 동네 정보를 알려준 건 동거인인 이자벨이었다. 이자벨은 한때 드라마와 단편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였으나 지금은 영어와 스페인어, 불어로 된 책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했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정신없는 크리스티나를 대신해 식사와 청소, 빨래 등을 직접 챙기는 이자벨의 모습이 아주 익숙해 보이는 걸로 봐서 둘 사이가 꽤나 오래된 듯 보였다.


숙소를 예약하던 당시, 사진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웬일인지 치즈 태비 한 마리만 보인다. 알고 보니 뱅갈 믹스였던 고양이 '우마'는 크리스티나의 고양이로, 작년에 신장의 문제를 앓으며 갑작스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했다. 에너지가 넘쳐서 한시도 가만있지 않아 늘 사고를 치던 아이가 한순간 사라지자 한 달가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반면에 이자벨의 고양이로 이제 18살이 되었다는 안토니오는 너무나 착하고 점잖은 고양이였다. 노령묘라서 움직임이 없는 것인가 했더니 처음 데려올 때부터(친구네 집 고양이가 낳은 8마리 새끼들 중 가장 몸집이 작아 안쓰러워 보였다고) 조용한 고양이였다고 했다. 천방지축이던 우마가 아무리 괴롭혀도 늘 참아주고 냥펀치 한번 날리지 않았다는 평화주의냥.


안토니오.png 그저 곁에만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안토니오. 우리집 노랭이와 너무 닮았다!


그런 안토니오에게는 미스터리가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골골송을 부를 줄 모르는 고양이라는 것! 목덜미나 배를 긁어주면 세상 모든 고양이가 자동으로 골골송을 부르는 게 아니었던가.


대신 안토니오는 기분이 좋으면 깔고 앉은 게 무엇이든(쿠션이든 이불이든) 그것을 입에 물고 쭙쭙이를 하면서 동시에 꾹꾹이를 하는, 2단 콤보를 특기로 가진 고양이였다. 침대에 누워 있을라치면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와 자는 걸 좋아했는데 목덜미를 긁어주면 내 옷을 온통 침 범벅으로 만듬과 동시에 꾹꾹이를 했지만 절대 골골송 따위는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꾹꾹이가 너무나 아픈 것이, 안토니오의 발톱이 정말 날카로웠기 때문인데 이자벨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발톱을 깎여본 적이 없단다. 매번 동물병원 수의사에게 데려가 깎였다는데 과연 어느 정도가 되어야 가는 건지 궁금했다. 애 발톱이 거의 바늘 수준이던데...




크리스티나와 이자벨은 말소리조차 아주 작았고 미팅이 있지 않는 한 바깥출입도 잘하지 않았는데 이런 두 사람이 아주 시끌벅적했던 날이 한번 있었다. 이름하여 '가을맞이 가구 재배치 프로젝트'.


전시회를 위한 마지막 그림까지 넘긴 크리스티나는 한시름을 던 탓일까. 그녀가 사랑해마지 않는 넷플릭스를 밤새 보고 느지막이 일어나 익숙한 듯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도와줄까, 했으나 손발 맞춰 일하는 두 사람에게 걸리적거릴까 싶어 안토니오와 함께 자진해서 방 안에 갇혀있었다.


얼추 조용해진 듯싶어 나가 보니 거실이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소품들과 의자 위치를 바꾸고 각종 펜들과 미술용품으로 어지러웠던 책상도 싹 치워져 그 위로는 근사한 천이 덮여 있었다.


집.png 가구 재배치가 끝난 거실, 그리고 내 방에서 보이던 하늘


알고 보니 이번 주말에 영화감독이라는 크리스티나의 딸 '살로메'가 저녁을 먹기 위해 온다고 했다. 검색을 좀 해보니 살로메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도 몇 번 초청된 적이 있는 포르투갈에서 나름 인정받는 독립영화감독이었다. 그 주말, 그녀가 왔다.


"너도 영화 비즈니스에서 일한다며?"

"응. 요즘은 국제영화제들에서 스태프로 일해"

"한국의 전주영화제는 나도 들어본 거 같아"

"네 영화도 언젠가 한국에서 볼 수 있음 좋겠다!"

"나는 그 뭐냐... H가 많이 들어간 한국 영화 있잖아, 그 감독 좋던데?"

"<하하하>의 홍상수 감독? 한국에선 그 감독 요즘 좀 시끄러워"

"왜?"

"같이 영화 찍던 여배우랑 바람이 나서"

"뭐라고? 와하하하하"


엄마를 닮아 예술적 재능이 남다른 이 아가씨도 한때는 고양이 집사였단다. 하지만 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뒤 몇 개월간 고양이 그림만 미친 듯이 그렸다고...


안토니오의 애기애기한 얼굴을 매일같이 보며 같은 치즈 태비인 우리 아들놈 노랭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언젠가 그놈도 18살이 될(때까지는 적어도 살거라 믿음)테고 점점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겠지. 그리고 그 이별이 정말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시간을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지금 많이 사랑해 주려고. 사랑한다는 게 뭐 별건가. 뭔가 대단한 걸 해주니깐 이건 사랑이야, 가 아니라 사랑하니깐 뭐든 해주고 싶어. 안토니오는 그냥 우리가 자기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한가 봐. 우리도 자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걸 알까 몰라."


그렇네. 이자벨의 말처럼 이별 뒤의 시간을 걱정하느라 벌써 우울해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지금' 이 시간을 고민하는 게 맞네. 그걸 아이들 곁을 자진해서 떠난 뒤 깨닫게 되네. 돌아가면 이제 떠나지 말아야겠네. 나밖에 모르는 바보냥이들, 많이 많이 사랑해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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