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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므스므 Nov 26. 2022

[D+51] 긍정의 힘

미국, 시카고

농장 관리인 조쉬가 한 건 했다.


어제 내 방으로 문제의 그 팬히터를 가져다주면서 방안 공기가 어느 정도 올라가면 도로 가져가겠노라, 고 하길래 뭐지 저 인간? 했더랬다. 하지만 이게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여전히 내 들숨날숨에선 괴물의 소리가 나고 있지만 방안 공기가 뜨겁지 않으니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왜 이걸 몰랐을까. 뉴욕에서도 주범인 팬히터를 껐어야만 했다.


원래 천식이란 게, 차가운 공기로 인해 겨울에 더 악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번에 깨달았다. 차라리 차가운 게 낫다는 걸. 답답한 걸 못 견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지 못하는데, 옷장에서 찾은 오리털 이불을 돌돌 말아 그 속에 들어가 있자니 이불속 공기가 딱 알맞은 온도가 되어 꽤 따뜻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마지막으로 꺼냈던 수면바지와 양말까지 입고 신고 독한 미국산 감기약까지 먹었더니 그럭저럭 몇 시간은 잘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 이틀인데 뭘 귀찮게 돈까지 버려가며 옮기나. 긍정의 힘이라니.




하지만 어제 옷장 안에서 뛰쳐나온 벌레들이 여전히 방 벽에 붙어 있다. 해가 뜨자 흰색 벽에 붙은 그들이 신경이 쓰일 만큼 더욱 잘 보인다. 아침 약을 먹고 더 자고 싶었지만 억지로 나가기로 했다. 


가장 볼거리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밀레니엄 파크'까지 간 건 좋은데 도저히 머리가 무거워서 시카고 문화센터에 잠깐 들어가 본 걸 빼곤 산책이고 구경이고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만 멀쩡했으면 제일 먼저 달려갔을 시카고 미술관도 입구까지는 갔다. 앤디 워홀의 특별 전시가 그제부터 시작한 걸 보고 내일 반드시 다시 오기로 하고 퇴각. 1층의 미술관 샵에서 2달러짜리 미니 수채화 물감을 샀더니 기분이 급 좋아져서(긍정의 힘) 집에 오자마자 색칠 공부 삼매경. 드디어 저널 한 권의 모든 페이지를 채웠다. 


시카고 문화센터 내 각종 전시


시민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던져주던 곳


시내 진출을 하긴 했다


우중충한 시카고의 날씨 때문인지 조형물이 더 기괴하게 느껴지는


시카고 미술관 샵에서 다시 발견한 내 최애 '꼬마 무희' 조각과 득템한 수채화 물감(폭이 3cm쯤 되려나)




어젯밤 벌레 사태를 겪으며 호스트인 데이비드에게 문자를 보내 놨었다. 어떻게 해달라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감기에 걸려 죽을 것 같은데 벌레들이 환영을 해주니 참으로 난감합니다만.


집에 오니 조쉬가, 데이비드가 방을 바꿔주라고 했다며 다른 방을 보여준다. 지금 방의 딱 2배 크기로 좀 더 비싼 방인 거 같은데 다행히 예약자가 없다고 청소부터 해줄 테니 기다려 달랜다.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하니 데이비드로부터 답장이 와 있었다. 정말 정말 미안해, 좀 더 나은 방으로 옮겨줄게, 그래야 내 맘도 편해질 거 같아, 근데 너 살아는 있는 거니?라는 안부 인사와 함께.


데이비드는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게스트들 중에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집을 떠난 뒤 후기에 폭탄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렇게 솔직히 얘기해줘서 고맙단다. 자기에게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사실 어젯밤 이 벌레들을 잡겠다고 파리채를 들고 다니던 이곳 학생들의 모습에 빵 터지며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려버린 것도 있고, 도착 당시 침대에 홑이불만 있었던 이유가 그 전날까진 반팔을 입어야 할 만큼 더웠기 때문이라던가 하는, 이해하려 들면 이해가 되는 상황이라 그만 마음이 착해져 버렸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좋아졌지만 지독하게 떨어지지 않는 이노무 감기. '언제 또 이 도시를 와보겠어?' 마인드는 이미 갖다 버린 지 오래다. 


한 가지 기쁜 소식은 지금 내 흡입기가 태평양 상공을 날아오고 있다는 거! 내 여행 동선 어딘가에서 아는 이와 마주치는 건 꿈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밤.


그림일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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