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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4] 스탠리 안녕

미국, 타코마

by 므스므

타코마란 도시를 선택한 건 별 이유가 있지 않았다.


원래는 서울로 치면 춘천쯤 되는, 시애틀 근처 '먼로'라는 도시에 제대로 된 고양이 덕후가 살길래 시애틀 들어가기 전 나흘 정도 머물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호스트가 갑자기 집에 사정이 생겼다며 게스트 방을 쓸 수 없게 되었으니 본인의 방을 쓰려면 와도 된다는 통보를 해왔던 거다.


자기 방을 쓰라는 말에 덧붙인 말이 더 가관이다. 자긴 1층 소파에서 자겠지만 욕실을 쓰거나 자기 물건을 가지러 가기 위해 들락거릴 수 있다고. 아니 이런 뭣... 아무리 내가 자기 집의 한 공간을 빌려 쓰는 것이라 해도 숙박비를 지급한 이상, 그 공간은 내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겠다는 말을 어쩜 저리도 태연하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너의 사정으로 생긴 문제니 취소는 니 쪽에서 하라고 했다. 내가 취소를 할 경우에는 이미 완납한 숙박비 중 에어비앤비 수수료를 제하고 환불받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묵묵부답이길래, 나를 호구로 본 것인가 하고 슬금슬금 열이 올랐는데 결국 전액 환불을 받았다. 그새 환율 차이로 만원 정도 벌었으니 열은 좀 식혀보는 걸로.


그리하여 급하게 새로운 숙소를 찾아야 했고 포틀랜드에서 시애틀로 가는 볼트 버스의 중간 경유지가 타코마이길래,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검색하다 보면, 내 조건(필터를 걸어서)에 맞는 곳을 찾다가 지역이 점점 넓어지곤 하는데 이 경우가 딱 그랬다. 타코마란 지명은 내 생전 처음 들어보지만 시애틀에서 그리 멀지 않기도 하고 잘 모르는 도시니 나흘 정도면 적당하다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어느 도시나 미리 예습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반나절 정도만 검색하면 대충 가고 싶은 곳들이 나오는데 이곳 타코마는 검색한다고 뭐가 나오는 그런 관광지가 아니었다. 이제 와 후회할 순 없고 이럴 때 쓰는 호스트 찬스.


아침에 커피 한잔을 하며 마주친 보니에게 어딜 가보면 좋을까, 하고 물으니 웬 티켓을 한 장 건네준다. '타코마 아트 뮤지엄' 무료 입장권. 게스트 중 하나가 남겨두고 갔다는 티켓을 손에 쥐고 신이 나서 집을 나섰다.


모네, 르느와르, 드가의 작품 전시와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봤던 멕시코의 '망자의 날' 전시, 그리고 전설의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은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센터 역할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으로 보였는데 역시나 나는 아이들을 위한 체험 코너에서 아이들에 '빙의'되어 열일하며 놀았다지요.


깜장과 노랭이를 위한 포틀랜드 기념선물이었는데 피오나 공주님이 먼저 개시를


탐1.png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미술관


탐4.png 도슨트가 없는 게 많이 아쉬웠던


탐3.png 이번 여행의 발견, 드가


탐2.png 애니메이션 <코코>의 실물 영접


탐5.png 심슨가족과 아들내미 바트


지금이야 컴퓨터가 알아서 하겠지만 예전엔 이랬다구


체험이 빠질 수 없지, 암


그렇게 신나게 놀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시카고의 호스트 데이비드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다. 지난 금요일 사랑하는 스탠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수의사 앞에서 평안하게 떠났다고 하는 걸 보니 아마 안락사로 보내준 것 같다. 문자를 읽는 순간 눈물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그냥 조금 아파 보이고 단지 말라 보이기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진 않았을 거다. 뼈밖에 잡히지 않던 내 손의 감촉과 눈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걷던 그 모습과 먹을 걸 달라고 기운 없이 울어대던 그 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가슴 한가운데가 뻐근해졌다.


저녁을 준비하던 보니가 놀래서 눈이 동그래졌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제대로 설명도 못하고 있었더니, 이리 오라며 나를 꼭 안아준다. 그녀도 집사이기에 이런 나를 이해해줬고 이 슬픔을 아무 말없이 함께 받아줬다.


보니 덕에 뻐근하던 가슴이 조금은 풀어졌지만 여전히 데이비드에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애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병원을 데려가지 않았는지, 결국 안락사를 택한 것이 최선이었는지 싶어서. 그는 그만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저 스탠리가 이제 더이상 아프지 않을거라는 사실만이 위로라면 위로일까.


64.jpg 그림일기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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