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타코마
타코마란 도시를 선택한 건 별 이유가 있지 않았다.
원래는 서울로 치면 춘천쯤 되는, 시애틀 근처 '먼로'라는 도시에 제대로 된 고양이 덕후가 살길래 시애틀 들어가기 전 나흘 정도 머물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호스트가 갑자기 집에 사정이 생겼다며 게스트 방을 쓸 수 없게 되었으니 본인의 방을 쓰려면 와도 된다는 통보를 해왔던 거다.
자기 방을 쓰라는 말에 덧붙인 말이 더 가관이다. 자긴 1층 소파에서 자겠지만 욕실을 쓰거나 자기 물건을 가지러 가기 위해 들락거릴 수 있다고. 아니 이런 뭣... 아무리 내가 자기 집의 한 공간을 빌려 쓰는 것이라 해도 숙박비를 지급한 이상, 그 공간은 내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겠다는 말을 어쩜 저리도 태연하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너의 사정으로 생긴 문제니 취소는 니 쪽에서 하라고 했다. 내가 취소를 할 경우에는 이미 완납한 숙박비 중 에어비앤비 수수료를 제하고 환불받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묵묵부답이길래, 나를 호구로 본 것인가 하고 슬금슬금 열이 올랐는데 결국 전액 환불을 받았다. 그새 환율 차이로 만원 정도 벌었으니 열은 좀 식혀보는 걸로.
그리하여 급하게 새로운 숙소를 찾아야 했고 포틀랜드에서 시애틀로 가는 볼트 버스의 중간 경유지가 타코마이길래,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검색하다 보면, 내 조건(필터를 걸어서)에 맞는 곳을 찾다가 지역이 점점 넓어지곤 하는데 이 경우가 딱 그랬다. 타코마란 지명은 내 생전 처음 들어보지만 시애틀에서 그리 멀지 않기도 하고 잘 모르는 도시니 나흘 정도면 적당하다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어느 도시나 미리 예습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반나절 정도만 검색하면 대충 가고 싶은 곳들이 나오는데 이곳 타코마는 검색한다고 뭐가 나오는 그런 관광지가 아니었다. 이제 와 후회할 순 없고 이럴 때 쓰는 호스트 찬스.
아침에 커피 한잔을 하며 마주친 보니에게 어딜 가보면 좋을까, 하고 물으니 웬 티켓을 한 장 건네준다. '타코마 아트 뮤지엄' 무료 입장권. 게스트 중 하나가 남겨두고 갔다는 티켓을 손에 쥐고 신이 나서 집을 나섰다.
모네, 르느와르, 드가의 작품 전시와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봤던 멕시코의 '망자의 날' 전시, 그리고 전설의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은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센터 역할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으로 보였는데 역시나 나는 아이들을 위한 체험 코너에서 아이들에 '빙의'되어 열일하며 놀았다지요.
그렇게 신나게 놀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시카고의 호스트 데이비드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다. 지난 금요일 사랑하는 스탠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수의사 앞에서 평안하게 떠났다고 하는 걸 보니 아마 안락사로 보내준 것 같다. 문자를 읽는 순간 눈물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그냥 조금 아파 보이고 단지 말라 보이기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진 않았을 거다. 뼈밖에 잡히지 않던 내 손의 감촉과 눈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걷던 그 모습과 먹을 걸 달라고 기운 없이 울어대던 그 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가슴 한가운데가 뻐근해졌다.
저녁을 준비하던 보니가 놀래서 눈이 동그래졌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제대로 설명도 못하고 있었더니, 이리 오라며 나를 꼭 안아준다. 그녀도 집사이기에 이런 나를 이해해줬고 이 슬픔을 아무 말없이 함께 받아줬다.
보니 덕에 뻐근하던 가슴이 조금은 풀어졌지만 여전히 데이비드에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애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병원을 데려가지 않았는지, 결국 안락사를 택한 것이 최선이었는지 싶어서. 그는 그만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저 스탠리가 이제 더이상 아프지 않을거라는 사실만이 위로라면 위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