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던 날이었다.
카톡으로 엄마한테서 문자가 왔다. 엄마는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셨다.
엄마의 얼굴 사진을 봤다.
갱년기의 극성 때문에 얼굴은 홍조로 뒤덮여있었고,
눈가의 주름은 비스듬한 형태로 쳐져있었다.
얼굴살은 탱탱함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엄마는 초점이 안 맞은 상태로 카메라 렌즈가 아닌 다른 먼 곳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들도 많이 있을까 싶었다.
엄마는 많이 늙으셨다.
세월의 흔적이 너무나도 고스란히,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왜 나는 엄마가 영생할 거라 믿었는가.
갑자기 엄마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자 과거의 기억 하나가 상기됐다. 기억과 상상의 결합 속에서 나는 가만히 슬픔과 죄의식의 바다에 잠긴다.
나는 엄마를 나의 기억 속에 어떤 부동의 모습으로 입력시켜놓았다. 엄마는 영원할 거라 믿어버리고, 나는 그 믿음을 한 번도 퇴고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본모습을 보고 난 후 가증스럽게 나는 기겁을 한다.
엄마는 죽음이라는 관문 앞에 나보다 더 가까이 있다.
엄마를 사랑하는 방법은 엄마가 나보다 일찍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에 있다.
죽음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가엾다.
우리는 모두 가엾기 때문에 각자를 보듬어 주어야 하는 사명감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12월의 파리는 바람이 시리게 분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엄마의 카톡에 답장을 한다.
(201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