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비워내고
결핍과 허기는 사제지간이다.
결핍은 비워지기 전에 느끼는 기시감이고, 허기는 비워내고 난 후에 느끼는 갈망 같은 것이다.
허기를 느낄 때 나는 결핍을 면치 못하고,
결핍을 느낄 때 나는 허기가 진다.
그러므로,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동시에 모든 걸 담으려 하는 역방향의 운동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다.
우리 인생에 필수 불가결한 사건, 즉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후엔 결핍의 부피가 증가한다.
이제는 더 이상 결핍을 외면할 수 없다. 결핍은 나를 지배하고, 나는 결핍의 숙주가 된다.
결핍, 즉 '무'의 주체가 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곧 결핍의 대책인가, 부산물인가.
우리는 결핍을 느끼기에 사랑을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사랑을 하기에 결핍을 느끼는 가.
사랑이라는 사건이 우리의 몸을 탐색하고 난 후 인생은 하나의 긴 변명으로 전락한다.
나는 당신이 아닌 모든 것들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산만해진다.
나는 '그' 곳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결핍으로 장악되기 전의 '나'를 상기시켜본다. 조금은 더 여유가 있고, 조금은 더 머무를 줄 아는 신체이다.
나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방법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렇게 허기는 커져만 가고, 나는 갈망의 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갈망한다.
사랑은 아이러니 안에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