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섭섭이 아니라 시원한 이별
그랜드 투어를 시작한 지 61일이 되었다. 같은 날 이탈리아를 여행한 지는 34일이 되었고 우리는 로마에서 다음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로 가는 비행기를 탑승하러 가는 길, 나는 이렇게 외쳤다.
“이탈리아! 한 10년 후에나 보자~”
한 달간의 여행에서 내 마음에 남은 건 애증이었다. 밀라노에서 출발해 남쪽 끝에 있는 시칠리아까지 22개 도시를 다녔다. 이탈리아 전국을 여행하며 분명하게 좋았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유쾌하지 않았던 경험도 적지 않았다.
볼로냐에서는 오랜 친구와 재회를 했고, 피렌체에서는 인생 스테이크를 만나 황홀했었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오랜 세월을 견뎌온 원형극장과 성당들을 보고 경탄했고, 바티칸에서는 세계적인 천재들의 작품을 만나 전율을 느꼈다. 아드리아 해변의 청량한 바다에서 즐긴 수영과 시칠리아로의 이색적인 기차여행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반면 나폴리 도심에서 만난 피자집 홍보직원의 난데없는 인종차별적 발언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차를 빌려 이동했던 동안에는 빈 쇼핑백이라도 두고 내리면 도난당할 거라는 경고를 계속 들었다. 실제로 이모가 이탈리아 경찰서에서 들은 온갖 절도 사건 중, 빈 쇼핑백 하나 때문에 차를 털린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도시였던 로마에서 바티칸 가는 길에 엄마는 소매치기를 당했다.
혼란과 분노를 식히며 도착한 바티칸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행사를 위해 나와 있었다. 순식간에 최악의 순간에서 운수 좋은 날로 바뀐 것이었다. 이 날의 에피소드가 이탈리아 여행 전반을 대표하는 하루가 아니었을까.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을 나는 한 달 내내 했던 것이다.
나는 웬만하면 여행에서든 일상에서든 안 좋은 일을 겪어도 좋은 점에 집중하려고 하는 편이다. 즐거운 마음을 지키는 것이 나에겐 더 소중한 일이니까. 이탈리아에서도 계속 행복한 점을 부각하고, 거슬리는 순간은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좋게 포장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전체적으로 좋았다고 결론 내리기엔 스트레스받았던 순간들의 잔상이 꽤나 강하게 남았다.
나는 치안이 좋지 않았던 나라에서도 살아봤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아닐까 싶은 스위스에서도 살아봤다. 내가 살았던 6개의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도 완벽한 곳은 없었다. 그래도 항상 좋은 추억들만 골라 마음속에 간직했다. 한 나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다른 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마다 아쉬웠고 얼른 다시 방문하기를 바라며 떠났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떠나면서 아쉬움보다 씁쓸함을 느꼈다.
나를 즐겁게 해 준 사람들, 내가 박장대소하며 웃음소리로 가득 채운 장소들이 생각난다. 그들과 그곳들에겐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앞으로 몇 년간은 이탈리아를 다시 찾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시원섭섭한 기분이 아니었다. 시원했다. 다음 나라로 가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가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