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처음이라는 이유를 빌려
비엔나에서의 첫날 아침, 하루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7시에 일어났다. 호텔 방에 남편은 보이지 않고 창문 커튼만 휘날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비친 커튼 뒤로 그림자가 움직이길래 봤더니 남편이었다. 활짝 연 창문 밖으로 카메라를 내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처음 보는 유럽의 아침 풍경을 렌즈로 담고 산뜻한 유러피언 공기를 맡고 있는 중이라며 웃는 남편과 함께 창 밖 비엔나 시내를 감상했다.
첫 일정은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bel) 전망(vedere)을 뜻하는 벨베데레 궁전 방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키스’가 전시된 곳이다. 정문에서 200m 즈음에 위치한 궁전의 웅대한 외관은 한눈에 봐도 헉 소리 나오게 압도적이다. 화려함과 치장의 대명사인 바로크 형식의 벨베데레는 밖에서보다 내부에서 더 빛났다. 그리고 찬란한 인테리어를 뛰어넘는 건 2만 점에 달하는 전시품이었다.
일정상 모든 작품을 다 보기엔 역부족인 2시간만이 주어졌다. 짧은 시간에 쫓겨도 서두르지 않으려 애썼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백마 탄 나폴레옹)’과 반고흐의 ‘오베르의 들판’ 같이 유명한 작품도 많았지만 처음 보는 그림, 처음 듣는 작가의 전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건너뛸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 많았지만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최대한 여유를 부렸다. 발길이 멈춘 곳에 서서 액자의 구석부터 천천히 눈으로 훑고 한 발 뒤로 가서 그림 전체를 감상했다.
마지막 피날레는 클림트의 ‘키스’로 장식했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기에 엄마의 찻잔에도 누군가의 핸드폰 케이스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실물로 영접한 ‘키스’는 역시나 달랐다. 기묘하게 꺾인 남녀의 목, 눈부시게 빛나는 금색 칠, 3차원과 2차원이 신비롭게 융합된 하나의 그림. 100년이 넘은 작품인데도 21세기 보다 시대를 앞선 독보적인 스타일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남편과 ‘키스’ 포즈를 따라 사진 한 장을 찍고 서둘러 나왔다. 다음 일정이 없었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폐장 시간까지 있었을 것 같다. 이 박물관 하나 때문에 비엔나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열 번은 더 가서 보지 못한 작품, 봤지만 놓친 디테일을 보고 또 보고 싶다.
다음 날 갔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인 쇤브룬 궁전은 벨베데레의 웅장함을 뛰어넘는 곳이다. 아름다운(Schön) 샘(brunn)을 뜻하는 쇤브룬 내 수십 개의 방을 지나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붓 대신 실로 표현한 디테일이 그림보다 섬세한 태피스트리(그림을 짜 넣은 직물)가 킹 사이즈 침대 두 배 만한 게 여럿 걸려 있는 방. 중국 예술인을 몇 명이나 데려와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게 했을까 궁금해지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동양화로 가득한 방. 전 세계 금이 여기에 다 모여 있구나 싶게 금장식으로 그득한 방.
총 1,441개의 방이 있는 쇤브룬의 2% 정도밖에 못 봤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고 무려 650년이나 제국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었다. 두 궁전의 호화찬란함은 오래도록 잊지 못하게 내 마음속에서 빛 날 것 같다.
첫날 오후엔 올해(heuriger)의 와인(Wein)의 줄임말인 호이리게에 갔다. 호이리게는 오스트리아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는 술집이다. 원래는 1년 중 포도 수확철(9-11월)에만 운영하며 그 해의 포도주를 팔았고 피크닉 음식을 싸들고 가서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콜드 디쉬 위주의 음식을 와인과 함께 판매하는 곳이 대부분이고 수확철보다 길게 운영하는 곳도 많다.
비엔나 시내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외곽에 위치한 와이너리 마을을 걸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기 시작해 포도밭의 젖은 흙과 풀내음이 잔잔히 풍겼다. 언덕을 오르고 올라 비엔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뷰가 보이는 호이리게에 도착했다.
10월 8일 방문이었는데 5일 전에 갓 수확해 만든 와인을 팔고 있었다. 아직 발효 과정이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이 와인을 슈트룸(Strum)이라고 부른다. 알코올 도수도 완전히 발효된 와인보다 낮고 좀 더 달콤하다는 설명을 듣고 시켜봤다. 포도 주스에서 와인으로 변화하는 중인 신생 와인! 살짝 톡 쏘는 탄산도 느껴지고 달달하면서 부드러운 칵테일처럼 상큼했다.
포도밭 옆, 시내 전경이 보이는 피크닉 테이블에 파라솔을 펼치고 앉아 햄 샌드위치, 치즈 플래터, 퐁신하고 촉촉한 빵과 함께 와인을 즐겼다. 슈트룸은 논알코올처럼 순한 데다 잔이 뽀얘질 정도로 차가워서 벌컥벌컥 들어갔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엄마도 동생도 홀짝홀짝 마시게 되는 맛. 그래서 순식간에 알딸딸하니 눈이 흐리멍덩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막걸리처럼 만만하게 봤다가는 훅 갈 수 있는 와인이 분명하다.
푸른 언덕 아래로 경관 좋고, 부슬비 내리니 분위기 잔잔하고, 술 한 잔 곁들이니 비에 젖은 몸이 따뜻해졌다. 키르기스스탄의 대자연에서 보낸 첫 2주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비엔나 와이너리. 신선한 가을 공기와 풍요롭고 단란했던 호이리게 피크닉이었다.
중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살았던 유럽은 나의 두 번째 고향과도 같다. 그래서 오랜만이었지만 처음 가본 곳도 친근하고 익숙했다.
하지만 유럽이 처음인 남편과 제부 덕에 나도 친숙했던 것들이 새로워 보였다. 여기저기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보며 감탄하는 남편, 흔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자갈길이 신기한 제부를 보며 나도 덩달아 신기해졌다. 또 내가 처음 왔다면 어떤 게 색다를까 하며 살펴보니 많은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구시가지의 골목골목이 박물관 같았고, 트램을 타고 스쳐 지나간 동상과 분수대 모두 유독 더 아름다워 보였다.
대학교 때 한 번 갔었던 비엔나에서 남은 기억은 비엔나소시지 정도였다. 그리고 역시나 소시지는 나를 실망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게 처음인 남편의 눈에 비친 신비로움과 매료된 마음이 나에게 새로운 필터가 되었다. 그 덕에 전에 비해 내 추억의 깊이도 넓이도 조금 업그레이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