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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star Nov 05. 2024

텅빈 삶의 수고로움

퇴사를 하고 한달 만에 다른 회사에서 일한지 석달쯤이 됐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 나에게 자부심이 되었던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사실이었고 노동조합을 하면서 내가 느꼈던 기쁨은 누군가에겐 악덕인 표독스러움, 난폭함, 비인간적인 면모 들이 때로 도구가 돼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나오면서 나는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모조리 부정하지 않으면 안됐다. 과연 기업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유의미한 일인가? 정책을 공부한 입장에서 중소기업 지원 정책의 일정한 유용성은 꽤 긴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로 기업들이 일자리를 만들고 기업 가치를 상승 시키는데 얼만큼 기여했으냐 묻는다면 내 응답은 오히려 현장에서 기업에게 듣는 고맙다는 한두마디, 비실증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인 피드백 들 따위로 부터 출발한 게 아닌가 하는 하나의 냉담함이 있다.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싸운다는 것, 오래도록 그것의 의미란 늘 더 악독하고 더 이기적인 사람들이 살아남는 싸움과 언제고 파도 아래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야 마는 비겁자들에게 이 사회가 유용하게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은 그저 연약하다는 이유로 언제나 비이성과 무기력을 택한다는 것 만을 남겼다. 내가 만들려고 했던 공동체는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동체이고 모두가 그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갖게되는 덕성이 작동되는 그런 공동체 였다. 안타깝게도 그런 공동체란 전설이나 신화 속에도 없는 걸였단 걸 난 너무 늦게 알았다. 공공기관에 오는 사람들이란 늘 무던하고 안전하게 살길 바라는 사람들이라는 것, 풀들이란 늘 바람이 불기도 전에 눕는 법이란 걸, 나같은 사람이란 가끔은 고맙지만 거의 언제나 한없이 불편한 사람이란 걸,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체 했는지도 모르겠다.


money is matter.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석사 박은 나에게 말했다. 그의 말은 그간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단 말에 이은 답이었다. 인권변호시가 되겠다는 시도가 실패했던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지나서 나는 더이상 이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 했다. 절대 사람들 앞에 서지 않을 것이고 결코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겠다는 건방을 부리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것은 내 스스로 만든 목표가 사실 목표에 닿지 않았다는 자기 경멸로 얻은 답이었다. 지난 7년의 시간이 내게 가르친 것 그리고 내 인생이 떠다시 한번도 닿은 적 없는 좌절을 마주하게 것은 이제 세상과의 실질적인 불화와 끝없이 목격되는 인간들의 부덕함이 이유였다. 아니다. 사실은 세상을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바라봤던 내 자신이 원인이었다. 내 퇴사를 못내 아쉬워 했다던 정치권과 꽤 오래 연이 닿았던 이사는 내게 점심을 사주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원래 그랬어요. 세상이 원래 그런거라고. 환멸이란 사실 꿈에서 깨었다는 뜻. 이제 세상을 바로보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네 안에서 세상과 인간에게 갖고 있던 그 틀을 바로 잡는게 옳지 않느냐, 그럼에게불구하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진 말라고 말했다. 


새로 옮긴 일터는 나에게 여려가지 경멸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이토록 하잘껏 없고 이토록 손쉽게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인가. 작은 감정적 부담을 감내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 것도 아닌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런 말들이 불편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시도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 내가 회사에 있을 때 너무나 손쉽게 만들었거나 어렵지 않게 설득하고 조정했던 그 글들이 딱 그만큼의 정성으로 작동되지도 멈춰 있지도 않다는 걸 매일매일 본다. 어떤 일이 되자면 누군가는 그 일의 주인이 되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인이 되길 포기하고 또 회피한다. 피곤하고 번잡스러우니까. 나는 주인이 아니니까. 


노동조합을 할때 한해 한해 회사의 일들을 만들어 갈때 내겐 모든 순간이 치열했고 모든 순간이 변화를 위한 다툼이었다. 내가 애정했던 3년간의 또다른 긴 프로젝트 무렵에도 그랬다. 모든 순간이 선택이었고 그 선택의 순간에 가능하면 관행과 익숙이 아닌 합리와 이유를 찾고자 노력했다. 합리적 근거가 없다면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다면 근본적으로 그것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얼만큼, 어느 시점에, 누구와 할 것인가 따위. 끊임없는 고민들이 키운 건 일의 성취 만이 아니라 나의 크기기도 했다. 나는 그만큼 자랐고 그만큼 많은게 잘 볼 수 있게 됐다. 사람들에게 어떤 동기를 제시할 수 있게 됐고 우리가 하는 일들의 가치와 의미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의 적합성을 떠나서 내 스스로가 가진 확신의 목소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람들에게 내게 대적할 용기를 뺏게 했다. 그게 내가 가진 힘이었다. 내겐 적어도 나를 작동하게 하는 명징하고 분명한 신념의 힘이 있었다. 하나의 선택을 해도 이렇게 투입하는 비용이 과연 기업들에게 가치 있는 것인가, 하나의 판단을 하더라도 이것이 과연 직원들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인가 등등. 그 앞에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게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뿌리를 뽑혔다. 뿌리뽑힌 삶. 2차 대전 이후 개인화된 삶을 이르러 미국 사회철학자들이 곧잘 하던 표현이다. 종교도 공동체도 사라진 곳에서 인간은 부유한다. 누군가는 가족을 마지막 뿌리라고 했지만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족은 더이상 우리가 발 디딜 곳이 아니다. 인간은 역사상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철저하게 뿌리 없는 삶, 그 가치와 의미들을 모로지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어린 시절 역사 공부를 하던 무렵에 배운 것처럼, 내가 어떤 재질에 무슨 색으로 된 옷을 입고 어떤 거리를 다닐 수 있고 어떤 직업을 할 수 있는지 정해져 있는 종류의 삶은 어쩌면 간명하다. 우리가 바랄 것은 사실 소수의 귀족적인 사람들 매우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종류의 욕망인 자유를 향한 욕망이었다. 이제 우리는 모조리 뿌리가 뽑혀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우리의 취향들이 우리의 삶을 잠시 잡아채고 우리의 삶의 단계들,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주식을 하는 그 명료한 욕망들이 삶을 잡아챈다. 우리의 뿌리는 근본적이기 보단 가변적이고 본질적이기 보다는 철저하게 실체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역사상 한번도 만난적 없는 모두가 철저하게 외로운 시대에 덩그러니 살고 있게 됐다.


내가 도달한 곳도 거기다. 내 집과 내 차가. 퇴사 후 시작한 주식의 수익률이, 점심 식사 따위가 추구해야할 그 무엇이다. 나는 단어의 밀도와 온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내 집과 차가, 주식 수익률과 점심 식사가 추구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목적어란 말인가.  오래도록 텅빈 삶을 삶았다. 젊은 날의 나는 주어진 모든 것들로 나를 그야 말로 탕진하는 날들을 보냈다. 매일 다른 여자를 만나고 매일 다른 술을 퍼마시면서, 길에서 잠을 자거나 술에 취해 기타 연주를 하면서 잠드는 탕아였다. 그때 나는 죽음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나는 죽음 앞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가열차게 몰락의 길로 내몰았다. 베수비오산에 너의 성을 쌓아라! 니체는 말한다. 그것은 몰락과 퇴락 앞에, 위기의 날들이 나를 더 뜨겁게 만들 것이란 걸 알았던 그, 아픈 몸으로 세계를 온 몸으로 살았던 그의 목소리 였다. 다시 나는 뿌리 뽑힌 곳에 도달했다. 남느냐 사라지느냐, 그것인 문제로다.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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