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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Jul 03. 2021

서양에는 그리스·로마 신화, 한국에는?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서양에는 그리스·로마 신화, 동양에는?  |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신화에는 다양한 철학과 지혜가 녹아 있어 시대가 변할수록 새로운 가치를 반짝인다. 특히 신화의 문화 콘텐츠적 가치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원초적 상상력의 보물창고로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빛난다. 어떤 식물의 특성을 알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듯, 한 문화의 정신적 원형을 알면 여러 방면으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 신화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그리스·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동양에도 역동적이고 스펙타클한 신화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로마 신화의 영웅들이 험난한 모험 끝에 사랑과 명예를 쟁취했다면, 동양의 영웅들은 나라와 문명을 열고 자연의 이치를 해석해 온갖 문화와 문물을 만들며 결국 신이 된다.


| 환웅천왕과 함께 온 풍백·우사·운사  |


우리나라 역사책들은 거의 단군 시대부터 시작한다. 단군신화의 내용은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삼국유사』의 내용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옛날에 환인이란 신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작은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어 하여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이 땅에 내려왔다.

즉, 어디선가 이주해 온 환웅의 삼천 무리는 곰족을 교화시키고 그들의 땅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곰족 여인(웅녀)과 결혼해 단군을 낳아 ‘조선’이란 나라를 열었다고 한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환웅천왕이 환인의 서자였고 어딘가에서 온 이주민이었다면 그 어딘가에 환웅 천왕의 아버지나 형이 다스리는 나라, 그리고 무리 삼천의 고향 되는 곳이 있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환웅천왕과 함께 360가지의 일을 주관한 풍백, 우사, 운사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웅천왕과 풍백, 우사, 운사는 대체 어떤 신들이며 그들은 이후 어떤 모습으로 우리 역사에 남았을까?

동양의 신화시대 기록을 뒤적이다 보면 ‘천왕, 풍백, 우사, 운사’라는 단어가 동시에 보이는 또 다른 시대를 볼 수 있다. 단군조선보다 약 250여 년 전 시대로, 바로 한국 월드컵 응원단의 상징으로도 유명한 ‘치우천왕’의 시대이다. 


| 도깨비 신을 따르던 풍백과 운사  |


당시에는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북성, 만주, 발해만 일대에 동이족의 나라가 많이 있었다. 그중 구려(九黎, 九夷)라는 부족국 연맹체의 왕을 ‘치우’라 불렀는데, 동양에서 최초로 청동기를 다루고 무기를 만든 ‘병기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었다. 치우천왕은 청동기로 긴 창, 굽은 창, 검, 방패, 활, 북의 5종 병기를 만들고, 구리와 철로 된 뿔 모양의 투구를 쓰고 다녀 도깨비의 상징이 되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동양 삼국의 문화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헌원의 후예를 자처했던 한나라 사관 사마천은 그가 쓴 역사서인 『사기』에서 치우가 헌원에게 졌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역사상 치우는 한중일 모두에서 최고의 강자이자 전쟁과 승리의 신으로 모셔졌다. 실제로 진시황과 한무제 등은 중요한 전쟁을 앞둘 때면 승전을 위해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올리곤 했다. 반면 승자로 기록된 헌원에게는 아무도 승리를 기원하지 않았던 점이 의외다.



|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의 오랜 전투 |


치우천왕은 보통 한민족의 뿌리라 여겨지는 동이족의 왕이고, 황제헌원은 중국 한족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치우천왕과 황제 헌원은 십여 년간 칠십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는데 매번 치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석기를 쓰는 헌원의 부대는 다양한 청동 무기로 무장한 치우 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치우는 도깨비들을 부리며 온갖 도술을 부렸는데 특히 안개를 잘 일으켰다. 헌원의 부대는 안개에 갇혀 갑자기 쏟아지는 낙석 공격을 받거나, 길을 잃고 헤매다가 불시에 기습을 받기 일쑤였다. 그래서 헌원은 방패의 사용법을 배우기도 하고 안개 속에서도 길을 찾기 위해 나침반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헌원의 승리는 늘 요원했다. 

그들의 마지막 전투는 하북성 탁록에서 벌어졌다. 헌원은 용을 잘 부렸는데 천년 묵은 응룡을 불러 많은 물을 모으게 했다. 큰물로 치우의 부대를 한 번에 쓸어버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치우는 바람의 여신 풍백과 비의 여신 우사를 불렀고, 응룡이 모은 물을 폭풍우로 휩쓸어 오히려 헌원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곤경에 빠진 헌원은 결국 자신의 딸 ‘한발’을 전장으로 불러들였다. 푸른 옷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 발은 대단한 미인이었지만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였다. 민둥민둥한 그녀의 머리처럼 그녀는 주변 모든 것들을 바짝 말리는 능력이 있었다. 발은 풍백과 우사가 일으킨 폭풍우를 모두 말려 버렸고, 마침내 헌원은 처음으로 치우를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발은 그 일로 인해 다시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때문에 그녀가 머무른 곳들은 모두 바짝 말라 버렸고, 그녀가 있는 곳에는 절대로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가뭄의 여신, 한발’이라며 몹시 싫어하게 되었다. 한발은 결국 농경의 신 숙균에 의해 사람들이 살지 않는 먼 곳으로 쫓겨났다. 가끔씩 그녀가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큰 가뭄이 뒤따라온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심한 가뭄을 한발이라고 부른다.


| 치우친왕을 배신한 운사는 누구였을까? |


이처럼 구려의 치우천왕은 풍백과 우사를 거느렸다. 이를 통해 풍백, 우사, 운사는 예전의 중요 관직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삼정승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치우 시대의 운사는 풍백, 우사와 함께 치우천왕을 돕지 않고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 답은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와 있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의 운사는 바로 황제 헌원이었다고 한다. 탁록 전투 이후 헌원의 후예들은 곰족과 호랑이족 등을 이끌고 고조선의 변방이 되는 하북성 쪽으로 갔다. 치우는 훗날 산동성에 묻혔고 그의 후예들은 그 일대와 남쪽으로 흩어졌는데, 기록에는 변한(弁韓), 묘족, 풍이(風夷)가 되었다고 한다. 변한은 훗날 가야에 흡수되었다.

그렇다면 치우천왕과 환웅천왕은 어떤 관계이며 풍백, 우사, 운사는 어떤 관직들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 단군왕검의 아버지인 환웅천왕은 어디서 온 누구였을까? |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어디서 온 누구였을까? 위서(僞書) 시비가 끊이지 않는 우리 고대 사서 『환단고기』에는 역대 환웅의 계보가 나와 있다. 그 책에 의하면, 황제 헌원과 싸우고 대륙의 남쪽으로 이동해 묘족의 시조가 된 환웅은 14대 자오지 천왕, 곧 치우천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환웅인 18대 거불단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와 무리 삼천을 이끌고 이 땅으로 건너와 곰족 웅녀를 교화시키고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민족은 거불단 환웅의 자손이 되는 셈이다. 

잠시 이 문제에 대해 주변국의 동태를 둘러보자면, 일본은 교과서를 왜곡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몇 천 년이나 시원을 끌어올려 고조선과 고구려마저 자신들의 역사로 귀속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단군조선조차도 외면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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