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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Jul 08. 2021

바람의 나라, 신라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날까지 전해진 바람의 여신 풍백의 풍속 : 영등제  |

예로부터 바람을 타고 다니는 새는 하늘의 뜻을 전하는 전령으로 신성시됐다. 특히 새들의 왕인 봉황은 바람을 몰고 다닌다고 여겨져 봉황[鳳]과 바람[風]의 두 글자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곤 했다. 오늘날 국무총리 같은 역할이었던 고대의 봉황 직은 후대에 ‘우두머리 백(伯)’을 붙여 ‘풍백’이란 이름으로 대치되었다. 따라서 치우 시대의 풍백은 아마 당시에는 바람을 뜻하는 다른 이름이었다가 후대에 풍백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리란 설이 있다. 더불어 최고의 지위와 여성성을 상징하는 봉황은 조선 시대까지도 왕비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주변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상나라에서는 ‘비렴’(飛廉)이라는 바람의 여신을 매우 중요하게 모셨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비렴’에서 우리말 ‘바람’이 나왔다고 한다. 또 상나라 사람들은 모든 길흉화복은 하늘과 땅을 오가는 바람이 몰고 온다고 믿어 바람의 여신에게 영풍제(寧風祭)를 올렸다. 이러한 믿음은 이후 신라에 영등제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는데, 지금까지도 영등제는 매년 봄마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지속되고 있다. 

음력 2월 초하루에 ‘영동 마고 삼신할미’라는 바람신[風神]이 내려와 한 해 일을 씨 뿌리고 결정지은 후, 보름에 승천하여 하늘에 보고한다고 한다. 때문에 한 해 일의 성패는 영등제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데, 영등신은 부엌으로 내려온다고 하여 반드시 여성이 제주가 된다. 농사와 생명 및 부족 운영의 근간을 여성으로 보고, 신성한 여성이 신관이 되어 제사를 주관하던 고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대체 왜 소호 금천과 상나라의 풍속이 오늘날까지 우리 문화에 남아 있는 것일까? 

과거에는 그 지역과의 왕래와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 민족 고유의 여성사를 보려면 신라를 보지 않을 수 없고, 신라의 문화사를 보려면 지금의 중국 대륙까지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신라가 새와 바람의 나라가 된 유래  |

그럼 다시 소호 금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소호는 우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신이다. 소호 금천의 증손자는 제곡 고신이라는 삼황오제 중 한 명인데, 『삼국사기』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고구려 또한 (소호 금천의 증손자인) 고신씨(高辛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_(『삼국사기』 「백제본기」)      


김유신의 비문에 또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남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은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씨이다. _(『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의 가계’)      


이처럼 당시인들은 소호 금천을 신라 김씨 왕실의 시조로, 소호의 손자인 고양씨는 고구려 고주몽의 시조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호 금천의 후손들은 어떻게 한반도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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