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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인식은 어떻게 확산됐나?

첫 번째 이야기

by 소정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시각 |


연인들은 사랑이 다 타 버리면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한다. 대개 끝까지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지만 최근의 이별 양상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별로 인한 폭력과 리벤지 포르노 등으로 아름다운 이별보다는 ‘안전한 이별’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안전하지 못한 이별’은 상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내 여자’를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 ‘내 소유의 여자’로 생각했기에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이별에 분노한다. 상대를 독립 개체로 인정하지 못하기에 이성으로는 이별이란 현실을 이해해도 감성적으로는 수긍하고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로 봄으로써 생기는 현상을 중년 부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집안의 큰일, 중요한 일은 대부분 아버지가 결정한다. 아버지가 최종 판단을 내리고 어머니는 그 결정에 따른다. 직장 문제, 친정 문제 등 개인적 문제조차도 많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린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여자가 나댄다, 여자가 감히’라는 윗세대의 따가운 질타를 받기 마련이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소유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우리 전통문화는 비교적 대등하고 자유로운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전통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남존여비 문화로 급격히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


| 조선의 여성관이 급변한 이유 |


조선 시대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시도 때도 없이 터져대는 왜란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왜국을 달래는 정책만 시행했을 뿐,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로 여겨 대비하지는 않았다. 삼국시대부터 문화 선진국으로서 일방적으로 왜국에 문화를 전해 주던 역사가 만든 오만이었다. 결국 선조 때 터진 임진왜란은 조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백성을 버린 채 홀로 도망가 버린 왕, 왜란을 예측하지 못했던 신하들은 오히려 이순신 같은 충신에게 모든 책임을 몰아 죄인으로 만들었다. 부패와 무질서 속에 관군도 무너져 왜군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도성에 당도했다.

그런 왜군의 앞을 가로막은 건 관군도 관료도 아니었다. 늘 천대받던 승려와 민초들이었다. 도망가 버린 관군의 빈자리를 승병과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떠안았다.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경제적으로도 농토의 삼분의 이가 황폐해졌고 엄청난 전사자와 포로가 생겼으며 수많은 유산과 시설이 불타 없어졌다. 백성의 삶과 조정의 세수는 말도 못하게 피폐해졌고 전쟁의 트라우마는 조선 전체에 큰 흔적을 새겨 넣었다.

칠 년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잇달아 겪으며 조선 지배층은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전쟁의 참담한 죽음과 파괴가 눈앞에서 자행될 때 인륜과 윤리는 생존 본능 앞에 꺾여 버린다. 그리고 부도덕과 패륜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면 곧 동조 효과를 일으켜 사회 전체의 질서가 무너져 간다.

당시 조선은 여러모로 부도 직전의 상황이었다.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기강도 해이해져 전쟁 통에 수많은 노비가 도망치고 양반은 몰락해 갔다. 때문에 조선의 근간인 신분질서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감추고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허울 좋은 논공행상을 하는 한편, 주자학적 사상 교육을 강화했다. 마치 6·25 전쟁이 끝나자 반공 교육을 강화하고 간첩설 등을 퍼트려 전 국민을 ‘빨갱이 타도’에 집중하게 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유래로 탄생한 것이 바로 광해군 9년(1617)에 완성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屬三綱行實圖)』의 간행이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로 지배층에 대한 혐오를 덮어 버리게 만든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책이었다.


| 지배층은 왜 충신보다 열녀를 더 강조하였을까? |


도덕명분을 중요시 한 주자학으로 나라를 연 조선은 충신·효자·열녀 중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까?

주자학적 가치대로라면 명분과 서열상 으뜸인 ‘충신’일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 충신이 많아야 유교적 왕도 정치의 실현이 용이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사례들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충신, 효자보다 ‘열녀’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충신·효자·열녀 모두 지조와 신님을 올곧게 실천하여 포상을 받고 이름이 남겨진 이들이다. 그런데 충신과 효자는 남성에게 해당하는 문제였고, 열녀는 여성의 문제였다. 도덕적 기강과 대의명분, 그리고 주자학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극한 순교자로서의 모습을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했던 것이다.


세종 16년(1434)에 풍속 교화를 위해 간행된 『삼강행실도』에는 충신·효자·열녀가 각 35명씩 수록되어 유교의 중요 덕목인 충·효·열(忠孝烈)을 고루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임란 이후에 완성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절반 정도가 열녀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내용도 유별나다. 조선 초까지는 남편 사후 재혼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열녀로 인정되었다. 세종 때 출간된 『삼강행실도』는 그보다 좀 더 심화된 열녀의 이야기가 보급됐다. 가족들이 재혼을 권유하자 거절의 뜻으로 귀와 코를 자르고, 굶주린 군사들이 남편을 잡아먹으려 하자 대신 끓는 가마솥에 들어갔다는 등의 내용이 등장한다. 사실 이 정도 수위도 인권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당한 엽기에 속한다.

그런데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여기서 한참을 더 나아간다. 약 40% 정도의 열녀가 단지 강간을 예방하려는 목적으로 자살한다. 나머지 이야기도 참담하고 맹목적이다. 열녀들은 남편에게 향하는 칼을 몸으로 막다 죽고, 남편이 죽으면 아이 앞에서 자결하거나 갓난쟁이를 버려둔 채 자결했다. 오직 남편만 따를 뿐, 아이에 대한 모정이나 다른 가족에 대한 인정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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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


남편과 시댁이 가장 중요하다는 관점은 효행(孝行)과 관련된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피난 중 시동생을 따르기 위해 친정어머니를 버리고 가거나, 남편이 죽자 시부모에게 흉하게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며 친정까지 가서 자결한 열녀도 있다. 하지만 열녀는 계속 쏟아져 나왔고 죽음도 더욱 장렬해졌다. 결국 ‘열녀 행각’은 점점 과격해지고 광기가 서려갔다.

남편을 물어간 호랑이를 쫓아가 목숨을 걸고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도 9건이나 되고, 남편의 병을 고치겠다며 손가락을 잘라 먹이거나 기도를 한다며 자기 손가락을 불태운 사례도 18건이나 된다. 심지어 집에 불이 나자 남편 신주(神主)를 꺼내려 불 속에 뛰어들었다가 죽은 경우도 3건이나 된다.

그녀들의 죽음 묘사도 참혹하기 그지없다. 항거하는 열녀들은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몸의 마디마디가 잘리고, 가죽이 벗겨지고, 배가 갈린다. 그런 지경을 묘사한 〈열녀도〉 속 그녀들의 모습은 고통조차 느끼지 않는 인형 같은 표정이다.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타자화’(他者化)라 한다. 타자화란 특정 대상을 나와는 아예 다른 대상이나 물건처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열녀도> 속 여성들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목숨보다 정조를 중히 여기며, 남편을 위해서라면 고통조차 달게 느끼는 ‘아예 다른 종(種)’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그녀들을 학대해도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감이나 아픔은 전해지지 않는다. 실제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전』 등에 등장하는 당시 열녀들의 죽음 묘사는 호러나 엽기 그 자체다. 그런 엽기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한 글줄을 읽다 보면 잔인한 죽음을 즐기는 듯한 편집자의 관점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럼에도 당시인들은 그런 책을 읽으며 큰 감동과 감명을 받는 데 동조해 갔다. 그리고 조선 사회는 그것을 더 깊이 내면화해 갔다.


전쟁과 지배층의 무능으로 인한 사회 전반적인 분노와 혐오의 대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엉뚱한 여성에게로 돌려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득은 과연 누가 보았을까? 누가, 왜, 그러한 혐오문화의 전이를 주도해 간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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