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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중기의 혼인 풍속도

by 소정 Aug 06. 2021
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조선 초·중기의 혼인 풍속도 | 


혼인 날 오후, 신랑은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며칠간 묵은 후 홀로 본가로 향했다. 몇 달 후 신랑이 신부 집에 와서 한참 머물다 가는데 곧 ‘재행’(再行)이라 한다. 그런 재행을  반복하다가 길게는 몇 년 정도가 지나면 마침내 신부를 데리고 돌아오는 신행을 하고, 이때 신부와 시어머니가 처음 대면하는 현구고례(見舅姑禮)가 치러졌다. 곧 오늘날의 폐백이다. 때문에 이 시기 조선 기록들을 보면 혼인한 지 오년 만에 시어머니를 처음 뵈었다는 등, 혼인 후 남편이 죽고서야 처음으로 시댁으로 분상(奔喪)하러 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보인다. 그럼에도 친영례를 보급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 아이나 손자를 낳고서야 시댁으로 향했던 고려보다 혼인 후 시댁에 가는 기간이 부쩍 짧아졌음을 볼 수 있다. 

신행을 마치고 시집살이를 시작하고서도 조선의 며느리들은 이따금 친정 나들이를 갔다. 이것을 근친, 근행이라 하는데 유교에는 없는 우리 풍속이다. 18세기 어느 양반집 기록에는 신행 온 지 한 달 반 만에 부인이 근친을 가서 1년 10개월 만에 시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이 보인다. 장마로 길이 막힐 것을 우려한 시댁 어른들의 만류에도 길을 나서거나,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보기 위해 사돈집을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또 딸의 근친을 요구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처가에서는 당당하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내 손녀딸이 친정에 한 번 오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네. 계획을 세웠다가 크게 어긋났으니 이 무슨 사리인가! ‘혼인은 고향을 벗어나지 않는다’(먼 곳 사람과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뜻)는 옛사람들의 말이 옳았네!”   (「의심김씨간찰」(KS0047-2-57-00057): 정진영(2019), p.251. 재인용.)  

처가에서 사돈댁에 딸의 근친을 요구하면 시부모들은 가마와 예물을 갖춰 며느리를 보내줘야 했다. 이처럼 며느리가 근친을 가는 것은 비용상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며느리들은 한 번 근친을 가면 아예 몇 달에서 몇 년을 친정에 머물다 오기도 했다.

18세기의 조선 혼인 풍속을 연구한 정진영 씨에 의하면, 18세기까지도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혼인 후 바로 신부를 데려오는 친영은 오히려 신부 집이 한미한 경우에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척 아저씨가 며느리를 맞는데 곧장 사람과 말을 보내 (시댁으로) 데려왔다고 하니, 신부 집이 이같이 한미한 집안인가?(1739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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