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21년 10월 20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창작지원금과 텀블벅 펀딩의 후원금으로 (도)아이필드에서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책에는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태종의 2등 공신인 이숙번의 둘째 딸은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인 후 죽었다. 어느 날 이숙번의 처 정씨는 조정에 상언 하나를 올렸다. 이숙번이 죽은 후 살림이 어려워져서 상처한 둘째 사위에게 딸에게 상속한 재산 일부를 돌려 달라고 했는데, 사위가 따르지 않으니 살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선 수많은 토론이 오갔다. 딸이 죽은 후 장모와 사위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죽은 딸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주요 안건이었다. 결국 조정은 이숙번 처의 재산권을 인정하여 그녀가 청원한 대로 재산을 처분하게 하고, 사위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았으니 삼강오륜을 어긴 것이라 하여 벌하였다.
이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여성들의 재산 관련 상언이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는 어머니와 아들 간에 재산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유교식 삼종지도를 실천하는 어머니라도 그 재산을 아들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렇듯 다른 유교 국가와 다르게 조선은 후기까지 여성의 재산권이 어느 정도 지켜지던 나라였다.
조선은 고려처럼 본래 일부일처제의 나라였다. 특히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이 원칙은 더 엄격하게 지켜졌다. 예를 들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헌사에서 장군 김우(金宇)가 본처를 버리고 첩을 아내로 삼은 죄를 탄핵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김우를 파직시켰다.
일단 조선의 양반이 이혼을 하려면 반드시 조정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만약 조선의 양반이 이유없이 본처를 버리고 새 아내를 얻으려면 처벌이나 파직을 감수해야 했다. 새 아내를 얻으려면 반드시 본처와 이혼해야 했지만 조정에서는 웬만해선 허락하지 않았다. 즉, 첩을 두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의 첩은 배우자의 개념이 아닌 일종의 소유 개념이었기에, 양반 부녀라도 첩이 되면 신분이 강등되고 본처를 주인으로 모셔야 했다. 또한 첩의 자손은 서얼(庶孼)이 되어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천대받았다. 보통 첩의 딸인 서녀(庶女)가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것 역시 혼담과 적당한 격식이 갖춰져야 했다. 혼인 의식을 제대로 갖출 필요가 없는 천민, 노비라도 마냥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당시의 가장 큰 재산은 노비인데, 여종을 잘못 건드렸다가 무서운 아내 손에 죽어 나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는 수가 있었다. 그런 사건이 터지면 나라에서는 양반 부녀는 처벌하지 못한다며, 여종을 죽인 부인은 내버려 두고 남편을 처벌했다. 가정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무서운 것은 아내만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고려처럼 친가, 외가, 처가가 모두 가족의 범위 안에 있었고, 대부분 장가살이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기에 처가의 눈치도 봐야 했다. 조선 초 실록에 실린 한 부부의 사건이다.
참봉 김자균의 아내는 윤홍의 딸이다. 김자균이 그 아내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매양 꾸짖고 욕설을 하니, (장인) 윤홍이 노하여 노비를 거느리고 김자균의 집에 와서 김자균의 머리털을 휘어잡아 땅바닥에다 끌고 재산을 다 빼앗고는 ‘아내를 버린다’라는 글을 강제로 요구하니, 김자균이 분노하여 “나는 사람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버렸다”라고 썼다.
조선 사헌부는 이 사건에 대해 사위인 김자균에게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의 다섯 덕목)을 문란하게 만든 죄가 이보다 더 심한 적이 없다”며 처벌을 주청했고, 김자균의 처는 무죄로 결정 났다.
그럼 수많은 민요에 등장하는, ‘바람 잘 날 없이 밖으로만 도는 서방과 한 맺힌 시집살이 이야기’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