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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Aug 14. 2021

양반 경쟁이 조선 여성문화에 미친 영향 1

* 참고 : 본 브러치의 글들은 <표류사회 : 한국의 가족문화와 여성 인식의 변화사>(가제) 라는 이름으로 2021년 9월 말 경에 출간되기로 하였습니다. 


| 조선의 양반 사대부가 주자학을 좋아한 까닭 |


본래 예(禮)란 황제와 그 친인척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의 주요한 일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외교와 타국 손님을 접대하며, 복잡하고 특별한 장례와 제사로 조상을 신격화하는 것 등이었다. 왕은 의식을 통해 하늘이 주신 왕권을 상징해야 하기에 신령한 권위와 장엄한 위엄이 필요했다. 그래서 특별한 상징이 담긴 특수 기물과 하늘의 뜻을 연상시키는 복잡한 의식 절차가 요구됐다. 

졸업장만 받는 졸업과 감동적인 졸업식을 치르는 졸업은 감정적으로 많은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의미가 녹아든 예식은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새롭게 빚어낸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법’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그리고 고대의 지배 권력층이 예를 독점하려 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나 행할 수 없는 예법을 통해 왕과 귀족들은 권위와 힘을 과시하며 특별한 사람들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행하던 고대 예식 전문가들이 바로 공자와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예법에 내재할 가치와 상징을 궁구하던 데서 유교라는 학문이 발전했다. 즉, 유학자들의 궁극 목표는 일상 속에서 인(仁)과 충서(忠恕)의 덕을 예로 실천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송나라 때에 이르면 유교는 빈 껍질만 남은 채 거의 잊혀져 갔다 그런 유교에 당시 유행하던 노불(도교와 불교)의 장점과 형이상학적 논리를 융합시켜 새롭게 부흥시킨 것이 바로 주자의 성리학이다. 

그렇기에 『주자가례』에는 당시 송나라의 모순이 담겨 있었다. 송나라에 만연했던 불교식 제사와 도교식 풍속을 유교식으로 바꾸고자 주자는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아이들이 엄마 물건을 써 보며 엄마 흉내를 내보고 싶어 하듯, 왕실만의 예를 재구성하여 사대부들이 쓸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자가례』라는 예법 책이다. 그 이면에는 고대의 종법 제도를 부활시켜 무너져 가는 신분질서를 다시 세우고, 짓밟힌 중화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주자의 꿈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잠시 방향성을 잃었던 조선 양반들의 필요에 딱 맞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숙여지는 ‘주자 성인’께서 만드신 복잡하고 낯선 예법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건 특별하고 멋진 일이었다. 주자학의 이론이 보여준 이상향을 조선에 실현하려는 꿈은 청나라에게 짓밟힌 자존심을 소중화라는 자부심으로 덮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학문과 재력이 부족한 몰락 양반, 가짜 양반들과의 차별성도 과시할 수 있었다. 그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조선 중기 예학의 발달과 함께 『주자가례』의 유행을 가속화시켰다.           


| 금수저 양반들의 선 긋기  |


그런데 『주자가례』는 중국 고대 왕실의 예법에 바탕한 것이라 복잡·난해하고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중 가장 낯설고 어려웠던 것은 바로 ‘종갓집 만들기’와 ‘가묘(사당) 세우기’였다.

중국 고대 문화에서 유래한 ‘종갓집 만들기’는 어렵고 복잡한 데다 비용도 많이 들었다. 게다가 『주자가례』가 상세하지 못했던 탓에 시대와 문화가 다른 조선에서는 잘 안 맞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게다가 종갓집의 권한이 커지면서 장남 집에 책임과 부담이 집중됐기에 가족문화로 정착시키는 것은 보통 사대부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명문대가들은 기꺼이 종갓집을 만들어 중국식 가문문화를 실천하고, 가묘를 세워 선조를 조상신으로 승격시키면서 특별한 우월함을 드러냈다. 더불어 학문 좀 한다는 가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주자가례』 이해 방식과 예식 문화를 만들어 갔다. 덕분에 학자들 간에 예에 관한 활발한 담론이 오가며 예학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더불어 집안 여성들이 『주자가례』에 걸맞은 현모양처·효부·열부가 되도록 교육과 통제를 강화했다. 부계 중심 가문을 만들고 상시로 제사를 올리려면 여성들이 남성 가문에 완전히 편입되어 헌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 몰락 양반들의 수직상승 비결  |


한편 몇 대째 관직에 오르지 못해 이름만 양반인 사람들도 다시 부흥할 방법을 고민했다. 우선,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은 열녀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열녀가 되어 정려문(旌閭門)을 받으면 고을과 가문은 승격되고 현감과 가문은 포상을 받았다. 또한 부역과 세금 등을 면제받기도 했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보다 며느리가 열녀문을 받는 것이 명문 가문이 되는 데 더 도움이 됐다. 하지만 잦아진 열녀의 탄생 덕에 열녀가 되는 문은 점점 좁아졌다.

둘째,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안의 족보를 팔기도 했다. 족보를 다시 찍을 때 양반으로 편입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슬그머니 끼어 주는 것이다. 웬만한 명문대가가 아니고서는 복잡한 족보의 빈칸에 정체 모를 이름 하나 끼워 넣었다고 의심을 받는 일은 별로 없었다.           


| 돈 많은 상민들의 양반되기 대작전 |


마지막으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했던 천민과 상민 출신 양반들은 어떤 노력을 했을까? 납속책으로 양인이 되고 공명첩으로 관직을 사더라도 고향에서는 인정받기가 힘들었다. 공명첩은 이름뿐인 명예직일 뿐 실제 관직을 주지는 않았고, 향촌에서는 본래 출신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양반으로 진입한 이들이 가문을 만들고 향촌에서 인정받을 가장 확실한 복권은 역시 ‘열녀 만들기’였다. 특히 대단한 사연의 열녀를 배출하여 나라님을 감동시키면 고을 전체가 승격돼 마을의 이름이 바뀌고, 현감은 승진하며, 열녀 집안은 고을의 자랑거리이자 보호 대상이 됐다. 또한 열녀의 자손은 ‘의로운 혈통’이 되어 관직을 노려볼 수도 있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족보 간행자를 매수하여 유명 본관을 모칭(冒稱: 이름을 거짓으로 꾸밈)하는 것이었다. 많은 노비가 양인이 되면서 성(姓)을 갖게 되었다. 부모 중 한쪽이 양인이었다면 부모의 성을 따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옛 주인의 성을 따르거나 지역의 중요 성관(姓貫: 성과 본관)으로 개관(改貫: 본관을 고침)을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간혹 유명 가문의 후손이 되려고 족보를 매수해 끼어들기를 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종종 족보싸움[譜訟(보송)]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유명 성관으로 개관하거나 족보 조작으로 소송이 붙어도 당대에만 문제가 되었을 뿐, 몇 대만 잘 지나가고 나면 자연스럽게 뼈대 굵은 가문의 후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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