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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Aug 12. 2021

‘쌍놈, 쌍놈의 새끼, 쌍년, 썅, 상스럽다’

* 참고 : 본 브러치의 글들은 <표류사회 : 한국의 가족문화와 여성 인식의 변화사>(가제) 라는 이름으로 2021년 9월 말 경에 출간되기로 하였습니다. 



| 상놈이란 말이 욕이 된 이유 |


무례하고 버릇없는 사람을 욕하는 말이다. 뜻인즉, 조선 시대 평민인 ‘상놈’ 같다는 소리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유래다. 천민이나 노비라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 평민 같다는 말이 욕이라니. 

흔히 조선을 반상(양반과 상민)의 나라라고 한다. 법제적으로는 양인과 천민 두 계층(양천제[良賤制])뿐인 다소 평등해 보이는 나라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양인’(양반-중인-상민)과 ‘천민·노비’(천민 중 대다수가 노비)로 다분화된 반상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중후반으로 갈수록 많은 상민이 천민·노비로 전락하여 17세기 부근에는 전체 백성의 30~40%가, 심지어는 한양 인구의 70%가 노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반면 18, 19세기에는 이와 반대되는 일들이 생겨났다. 그 많던 노비가 점점 상민과 양반이 되면서 양반의 수가 급증했고, 성씨조차 없던 대부분의 백성이 2~5%에 불과했던 명문대가의 본관과 성씨를 갖게 되었다. 마치 1980년대 경제부흥기 때 땅 투기 등으로 벼락부자가 많아지자 ‘졸부’란 욕이 생겨났듯, 노비가 상민이나 양반 되는 일이 잦아지자 ‘상놈의 자식’이란 말은 욕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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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노비가 되었는가? |


고려까지는 전쟁 포로, 역모 죄인, 범죄인, 빚을 못 갚은 양인 등이 자신의 대에 한해서만 노비가 되었다. 즉, 당시의 노비는 대부분 죄인이나 이민족 포로였다. 그조차도 60세가 되면 풀려나서 자손에게 세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역모, 포로, 범죄, 파산으로 인해 노비가 된 자들은 오히려 적었다. 단지 부모가 노비라는 이유만으로 노비가 된 세습 노비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이 대(大)중화의 나라라며 본받고자 했던 송나라, 명나라가 노비 세습을 금지하고 몇 차례나 노비 해방을 단행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 모든 일은 지배층의 욕심 때문에 빚어졌다. 지배층이 지배층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식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하루 종일 학문과 정치만 할 수 있도록 노비에게 삶의 현장을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에게 노비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 땅이 아무리 많아도 농사짓고 밥을 해 주는 노비가 없으면 책을 읽고 정치를 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축 번식시키듯 노비를 늘이는 것이 권력 유지와 재산 증식에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정치 권력을 가지고 사회정책을 만들 수 있었던 양반들은 노비를 늘리고 유지할 온갖 정책과 꼼수를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엄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로 만드는 법) 등을 왕에게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자녀도 천민이 된다)의 원리를 법으로 정착시켜 갔다. 게다가 가난한 상민을 자신의 노비와 혼인시켜 그들의 자손을 노비로 거두거나 흉년에 빚진 상민을 자신의 노비로 삼는 등, 별의별 방법으로 노비를 늘려 나갔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나다 보니 수많은 양민이 노비가 되어 주인집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4~5% 밖에 안 되는 극소수 양반들은 책상 앞에 앉아 노비 농사를 지었다.   

   

| 노비가 많아지면서 생긴 문제  |


노비가 늘수록 조선은 약해졌다. 부역과 세금은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상민들의 몫이다. 세금 낼 상민이 줄자 국가는 가난해졌고, 양반가는 수백 명씩 노비를 거느린 ‘대갓집’이 되어 갔다. 결국 16·17세기에는 백성의 절반 이상이 노비가 돼 버렸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과거에도 얄짤없었다. 노비가 늘수록 가치와 대우는 박해졌고 주인의 수탈도 가혹해졌다. 때문에 노비들의 원성이 높아졌고 급기야 도망치는 노비가 생겨났다.           

| 노비의 종류 |


노비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주인집에서 함께 지내며 온종일 주인집 일을 하는  솔거노비. 그리고 외지나 타지에 살며 신공(身貢: 몸값)만 바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외거노비는 신공 이외의 생산물은 자신의 재산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다. 부유한 노비는 멀리 도망치더라도 관이나 다른 양인을 돈으로 매수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타지에 정착하기가 보다 수월했다. 게다가 두 차례의 전란 때 이미 많은 노비문서가 불타고 유실되어 제대로 찾아내기도 힘들었다. 전쟁 후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필요 속에 노비들이 할 일은 더욱 늘었고, 혼란한 사회 분위기에 처우는 더욱 팍팍해졌다. 하지만 혼란은 새로운 기회의 장이기도 하다. 몰락한 양반만큼 재산을 소유한 노비도 늘었고, 결국 노비들의 도망은 유행처럼 번져 갔다.  

하지만 변화에는 저항이 있는 법이다. 17세기 중반(1655년) 효종은 북벌을 위한 군수자금 마련책을 고민하다가 공노비 19만 명 중 몸값을 내는 자는 고작 2만 7천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효종은 도망간 공노비들을 추쇄(推刷: 도망간 노비들을 잡아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하는 추쇄도감을 설치했다. 추쇄도감은 2년간 전국에서 약 9만 3천 명의 공노비를 추쇄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추쇄 분위기에 힘입어 사노비의 주인들도 추노객(도망간 노비를 전문적으로 잡아들이던 사람)을 고용해 노비들을 잡아들였다. 당시 노비 5~6인을 잡아 오면 노비 1인을 준다거나 노비들의 몇 달치 몸값을 준다는 등의 대가가 있었기에 전문적인 추노객이 계속 늘어갔다. 이로 인해 노비 추쇄가 너무 심해져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다.           


| 노비에서 벗어나는 방법  |


그런 고달픈 처지에 놓인 천민 노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 바로 납속(納粟)과 군공(軍功)을 통한 공식적인 신분 탈출이었다. 납속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때부터 정조 때까지(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국가재정을 늘리기 위해 꾸준히 시행된 공식 신분 세탁 제도이자 만능 치트키(‘속이다’는 의미로 주로 게임에서 사용하는 만능 해결 코드)였다. 천인과 노비는 양인이 되게 해 주고[免賤(면천)], 양인은 군역과 신역을 면제해 주며[免役(면역)], 서얼은 벼슬하게 해 주고[庶孽許通(서얼허통)], 몰락 양반은 이름뿐이지만 높은 관직을 족보에 남기게 해 주었다[受職[수직)]. 

조선의 근간인 신분제도를 뒤흔들 이런 엄청난 일을 왜 국가 차원에서 진행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세금을 내는 상민을 늘리는 것이 국가로서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왕실은 국가재정을 위해 천민에게도 납속책을 팔았다. 국가재정이 궁핍해질수록 더욱 다양한 종류의 납속책과 공명첩이 등장하여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켰다. 때문에 임진왜란 발발 3년(선조 28년[1595]) 만에 이미 ‘평안도에는 공명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보고가 올라갈 정도로 납속과 공명첩이 마구 남발되었다. 이것이 누적되자 심각한 신분 변동을 야기했고, 실제로 양반으로 신분 상승하는 천민도 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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