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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7. 2021

[논어에 나를 묻다] 제1장. 「학이장(學而章)」1-5

증자의 매일 습관

曾子曰 吾日三省吾身하노니 爲人謨而不忠乎아 與朋友交而不信乎아 傳不習乎아니라 
증자왈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증자 말하길, 나는 매일 내 자신을 세 가지로 반성해 보는데, ‘①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함에 충직했는가?, ② 벗과 교류함에 믿음직했는가?, ③ 전해 받은 것을 잘 익혔는가?’ 이다.     


     

  흔히 공자의 계보는 ‘안-증-사-맹’으로 전해졌다고 말하곤 한다. ‘안증사맹’이란,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인 안자, 공자의 제자 어리고 둔하지만 우직했던 증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 그리고 공자 사후 100여 년 후에 태어나 시대적 거리가 있지만 공자의 도를 다시 일으킨 맹자를 말한다. 

  이처럼 증자는 공자의 제자 중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했고, 정치나 외부 일보다는 자신을 성찰하고 도를 몸소 실천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래서 가장 우둔하다고 여겨졌지만, 실천과 연마를 통해 공자의 숨은 뜻을 가장 절실히 체득한 것이 증자였다. 그래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吾道 一以貫之)”는 아리송한 말을 했을 때, 그 뜻을 알아듣고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해석해내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훗날 노나라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 공자의 도를 전해 유교의 큰 기둥이 되었다.      

 

 그런 증자가 매일같이 습관처럼 행했던 자기 성찰 방법이 바로 ① 충(忠), ② 신(信), ③ 습(習)이다.      

그럼 충(忠), 신(信), 습(習)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훗날 송나라의 현인으로 알려진 주자는 ‘자기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忠)이고, 정성을 다하여 실답게 하는 것이 신(信)이며,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이 몸에 체득되도록 익숙히 연습함이 습(習)’이라고 설명했다.      

 재밌는 것은 성찰의 대상이 타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라는 점이다. 타인이 나에게 어떻게 했느냐를 살피거나, 그냥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남을 위한 일을 도모했는가, 또 남을 위해 도모하는 그 마음과 행동이 정말 충실했는가를 반성해 본다. 친구와 교류할 때도 친구에게 허세나 거짓 없이 정성되고 실답게 교류했는가를 반성해 본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애덤 그랜트 조직심리학 교수는 사람들의 군상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바로 베풀고 돕는 데서 큰 의미를 느끼는 이타적 인간인 기버(giver), 손해와 이익을 저울질하며 받은 만큼만 되돌려 주는 안전주의자 매처(macher), 조심스럽고 방어적이어서 주기보다 받기를 더 이기적 인간 테이커(taker)이다. 초반에는 주변을 돕는 데 시간과 열정을 쏟는 기버가 가장 낮은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에는 거의 항상 기버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반면 초기에 가장 높은 성과를 보인 것은 테이커였는데, 테이커들의 활약은 의외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받은 대로 돌려주는 매처들이 결국 테이커를 응징하려 나섰기 때문이다. 덕분에 테이커는 끝내 성공의 꼭대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애덤 그랜트 저/ 윤태준 역(2013), 『Give and Take』, 생각연구소.) 

 이 이론은 가장 행복하고 성공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결국 가장 도덕적이고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했던 이들임을 보여준다. 증자가 매일 세 가지로 반성해 보았던, 사람을 위해 진실되게 일을 도모하는 자세와 동료를 진실되게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성공하는 기버로 향하는 가장 좋은 일상적 실천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증자가 매일 반성한 중 하나는 바로 배움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그날 배운 것이 몸에 체득될 때까지 열심히 익혔는지를 반성했다. 배움은 배움으로만 끝나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을 반복해서 연습하고, 몸에 익혀서 내 생각과 내 습관과 내 기술로 만들어질 때야 비로소 ‘내가 그것을 배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배운 것을 그냥 배웠다는 사실만으로 끝내면 그것은 나 자신을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나의 현실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나와 내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것은 결국 안 배운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한 배움은 그냥 내 주변을 잠시 거쳐 지나간 ‘흘러간 지식’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의미는 다 사람에게서 나온다. 모든 성공과 실패가 다 사람에게 달려 있고, 일의 의미와 가치 역시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 사람이 그 일을 맡으면 그 일은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그 일을 맡으면 그 일은 실패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인사에 신경을 많이 쓰고 많은 투자를 한다. 증자의 ‘매일 반성법’은 마지막에 성공하는 ‘기버’의 길과도 같다. 눈앞의 이해관계와 이익을 넘어 결국 사람에게 충심을 다하고, 사람과 교류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기 마음을 반성해 본다. 어쩌면 자신이 대하는 타인의 모습과 그들과의 관계야말로 나 자신을 보여주는 거울이라 여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람 간의 관계가 좋고 나쁨도, 다 함께 도모하던 일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도, 결국은 모두 나 자신에게 달린 문제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궁극적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은 이기심을 부리거나, 남탓을 하거나, 몸을 사리는 것 등이 아닌 ‘나 자신을 반성하고 고쳐가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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