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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 아래에서

그리움이 한가득

by 호수공원

짙푸른 하늘의 뙤약볕이 따갑기만 한 7월이다. 한여름의 어느 날, 여름방학,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들...

하늘나라에 계신 친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뜨거운 태양처럼 강렬했던 그날의 기억들, 내가 태어나기 전 돌아가셔서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동시대에 다른 삶을 살았던 할머니들과 유독 나를 예뻐하셨던 친할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그곳에 가면


어린 시절, 동이 트기 전에 부모님과 언니 이렇게 우리 가족은 서둘러 고속버스를 타고 아빠의 고향 집에 갔다. 어느덧 햇볕이 따사롭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다다랐을 때 절구에서 떡을 찧는 쿵덕쿵덕 소리가 들려온다. 몇 걸음을 더 걸으면 아궁이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허름 하지만 정겨운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다.

마당에서 할아버지는 절구에 떡을 찧고, 할머니는 뭉쳐진 찹쌀을 조물조물 반죽하고 계셨다. 일을 하시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멀리서 왔다며 무척이나 반가워하신다. 절구의 떡이 완성되면 할머니께서는 콩고물을 고루고루 묻혀 주신다. 여태껏 수많은 떡을 먹어 보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해 주신 쑥 인절미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쯤 여름이었나? 조금 더운 날이었다. 그날은 할아버지께서 우리 자매가 좋아하는 순대를 만들어 주신다고 돼지 몇 마리를 트럭에 싣고 오셨다.

어린 나이에 나와 언니는 돼지를 도축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도 깜짝 놀라 기겁하고 안방에 숨었다. 돼지들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무서움과 돼지에 대한 연민으로 언니와 나는 그 소리가 멈출 때까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큰고모는 자꾸 울기만 하는 우리를 달래 주려고 순대 만드는 것을 보여 준다며 부엌에서 불렀다. 돼지 창자에 당면과 채소, 돼지의 빨간 피를 넣고 푹 찌면 순대가 된다는 것을, 징그럽긴 해도 찬찬히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나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방에 있었다. 큰고모는 찜통에서 갓 나와 연기가 모락 한 송송 썬 순대를 접시에 담아 주었다. 큰고모는 할아버지가 우리 자매를 위해 애써 돼지까지 잡으셨다며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도무지 입에 댈 수가 없었다. 큰고모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나이가 제일 어린 사촌 남동생이 순대 한두 개를 집어 먹었다.

“우웨에에엑”


그 후 한동안은 순대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끔찍했던 그 기억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추운 겨울날이면 어김없이 순댓국을 먹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순댓국은 나의 시린 속을 달래 주는 소울푸드가 되었다.


잊지 못할 여름방학의 추억


내가 12살이 되었을 때이다. 와우! 신나는 여름방학! 엄마와 이모들은 작당하고 나와 언니를 비롯해 사촌들을 한꺼번에 외할머니가 계시는 시골로 보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언니를 따라 사촌들과 외갓집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사촌들은 다 여자라서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똘똘 뭉쳐 잘 놀았다. 학원도 안 가고 부모의 간섭 없이 우리끼리만 가는 여행이라 여기며 무척 신났다. 하루의 반나절을 기차에 몸을 싣고 종알종알 떠들면서 갔다.

저녁이 다 되어 외갓집에 도착하였다. 외할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반가움은 뒷전이고 긴 한숨만 푹 쉬셨다.

“이 썩을 것들아! 와서 밥 먹어.”

우리를 보며 시큰둥한 할머니의 모습과는 달리 나는 시골에서 보내는 여름방학은 어떨까? 괜스레 들뜬 마음과 함께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잠을 자는데 어디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외갓집에서 들어 본 적 없는 그 소리가 축축한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아침이 되어 외할머니한테 밤에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막내 삼촌이 짐승 한 마리를 집에 데리고 와서는,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잠깐 맡겨 놓은 거라고 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분명 늑대 같은 모습인데 개라니, 그 개는 신기하게도 멍멍 울지도 않고 고개를 쳐올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어우~”하고 울었다. 동화 속 빨간 모자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저 늑대 모습을 한 개가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관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갈 때면 무서움에 벌벌 떨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나? 밖에 나갔다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 개는 또 “어우~” 하면서 나를 보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불현듯 용기를 내어 그 개한테 다가갔다. 팔랑거리는 꼬리가 내 다리를 스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니 녀석은 납작 엎드려 나를 핥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오기를 기다렸었구나.’ 입가에 손을 갖다 대어도 날카로운 이빨로 물지도 않는 순한 녀석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녀석과 함께 놀며 무척 예뻐해 주었다. 우리는 녀석에게 ‘복실이’라고 이름도 지어 주었다. 우리는 복실이를 따라 한다고 ‘어우~’하고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럴 때면 복실이는 자기도 “어우~”하고 울면서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더 힘차게 흔들었다. 늑대같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모습이 용맹스러워 우리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복실이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든든함도 느껴져 매일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주말이 되어 막내 삼촌이 외갓집에 올 때면 우리는 시내로 나가거나 전주와 무주 등등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삼촌 친구가 놀이공원에서 일을 하여 좋아하는 바이킹을 질리도록 탔다. 피부가 다 벗겨질 때까지 수영장에서 한바탕 놀기, 잔디밭에서 엉덩이가 흠뻑 젖도록 물썰매를 타고 신나게 놀았다. 푹푹 찌는 더운 날이지만 시원하게 여름방학을 만끽하고 있었다.

3주 정도 흐른 후에는 작은 이모가 사촌 중에서 유일한 사촌 남동생을 데리고 외갓집에 왔다. 우리 같은 여자들은 외할머니한테는 ‘썩을 것’이었지만 당시 남아선호사상에 잔재가 있었던 외할머니에게 사촌 남동생은 귀한 존재였다. 우리는 그 점을 이용하여 아이스크림 먹고 싶을 때면 사촌 남동생을 이용해

“할머니한테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말해봐.” 하며 야금야금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기도 했다.

개학할 때쯤 정들었던 복실이와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우리는 학교를 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1년 후, 외갓집에 갔을 때 복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개, 복날 전에 개장수한테 팔아 버렸어. 개가 멍멍 짖지도 않고 어우 하고 울어 대는 게 하도 이상스러워서 개장수가 왔길래 팔아 버렸어.”

막내 삼촌은 화를 내며

“그 개는 일반 개랑 다르다고 잘 맡아 달라고 했잖아. 그 족보 있는 개를 내다 팔면 어떡해!!

그 개 엄청 비싼 개란 말이야!!”

“개가 다 똑같은 똥개지! 족보 있는 개가 어딨다고 그려!!”

나중에 알고 보니 복실이는 썰매 끄는 개로 유명한 ‘시베리안허스키’였다.

나의 첫 동물 친구 복실이, 처음으로 동물과 나누었던 그 교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복실이가 개장수한테서 도망쳤으면 하는 바람과 복실이를 다시는 볼 수 없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왜 그렇게 일찍 가셨나요...?


내가 18살 때,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작년에 각종 합병증으로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무척이나 슬프고 침울하게 할머니를 하늘에 보내드렸을 때와는 달리 시골에서 홀로 계시는 할아버지에 대한 ‘호상’이라며 담담하게 할아버지를 보내 드리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할아버지의 죽음을 큰 슬픔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 어느 날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유독 나를 예뻐하셨던 할아버지였다. 내가 철없을 적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제대로 못 해 드린 것에 대한 후회와 죄송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작은 아빠의 아들인 친손주들보다 언니와 나에게 더 잘해 주시고 예뻐해 주셨다.


유년시절,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트리가 갖고 싶어 언니와 엄마한테 졸랐다. 엄마는 비싸다는 이유로 안 된다고 하였다. 그때 할머니도 우리 집에 며칠 계셨다. 할머니는 우리 자매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집 뒷산에 가서 크리스마스트리와 가까운 나무 한 그루를 베어 오셨다. 언니와 나는 무척이나 신나 하며 트리를 열심히 꾸몄다. 그렇게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민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 추억이 되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자신보다 더 큰 나무를 베어 오셨던 그날이 문득 떠오른다.


두 분께서 주신 아낌없는 사랑에 아무것도 해 드린 것 없이 받기만 했던 나는, 내가 좀 더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더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해드렸을 텐데... 아쉬운 마음과 함께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나는 장손인 남편과 결혼하여 어렵사리 임신했다. 나는 첫아기가 딸이라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손이 귀한 집안에서 어머니는 내색은 안 하셨지만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친손주인 사촌 남동생들보다 언니와 저를 더 예뻐해 주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주신 큰 사랑에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시대의 로맨티시스트 할아버지


일제 강점기에 장남으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평소에는 말씀이 없으시다 간혹 술을 드시면 나와 언니에게 일어를 가르쳐 주곤 하셨다. 남자 형제들만 있는 집에 외동딸로 태어나 곱게 자란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다. 증조할머니는 무척 고약한 성격에 할머니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순하디 순한 할머니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모진 시집살이를 묵묵히 견디셨다.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켜주기 위한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 주기로 굳은 마음을 먹고, 할머니와 자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셨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 사상이 지금보다 더 뿌리 깊게 남아있던 그 시대, 할아버지의 결단에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한테 손가락질하며 죄인 취급 했다.

지금 이 시대 살아계셨더라면 다신 없을 로맨티시스트 할아버지!

그렇게 두 분은 농사를 지으시며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부지런한 할머니의 허리는 고된 농사일로 많이 굽으셨지만, 고단한 삶 속에서 할아버지와 금슬이 참 좋으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크게 다투신 적도 없었고, 주무실 때도 두 손을 꼭 잡고 주무셨다. 두 분은 굳건한 믿음과 영원한 사랑으로 백년해로하셨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잔병치레 없이 무척이나 건강하셨다. 그러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으셨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6개월 후쯤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람들은 말했다. 동네에서 두 분은 잉꼬부부로 소문났었기에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못 잊고 그리워하다 따라가신 거라고...

이 시대에 다신 없을 두 분의 변치 않는 아름다운 사랑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이 세상을 떠난 저 멀리 하늘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든든한 사랑의 힘으로 다시 만나서 오순도순 잘 지내고 계실 것만 같다.


멋쟁이 외할아버지


오래전, 외갓집에서 오래된 앨범 하나를 보았다. 사진 속 훤칠한 외모에 멀쑥한 양복을 입은 신사! 내가 보고 싶었던 외할아버지였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 외할아버지는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은 멋쟁이셨다.

외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호인’으로 사람들은 모두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그런 호인의 기질이 외할머니한테도 발휘되었으면 좋았으련만 할아버지는 바람둥이였다. 그래서 두 분은 자주 싸우셨다.

할머니께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할머니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건강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오 남매를 키우셨던 외할머니, 장녀였던 엄마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하여 공장에 취직하였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개그프로에 개그 코드를 이해하고 9시 뉴스를 보며 정치를 얘기도 하셨던 외할머니에게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은 치매가 왔다.

고령화 시대, 대학교수도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십여 년 전에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나를 비롯한 가족과 친척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할머니, 제가 지금 몇 살인 줄 아세요?”

“지금 20살 되었지. 아마. 이 썩을 것! 나이가 스물이 되고도 시집도 안 가고 집에 붙어있냐?

얼른 시집이나 가!”

그때 내 나이는 서른 초반이었다. 할머니가 치매가 오기 일 년 전에는 내 나이를 얼추 맞추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고장 난 시계처럼 오래전 기억 속에 지금의 삶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리고 힘든 시절 기억의 오류를 편집하시기도 하시며 크게 화를 내셨다가 통곡하며 울기도 하셨다. 또 같은 얘기를 하루에 여러 번 반복하며 얘기하시고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한 번은 할머니께 빵을 사다 드린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맛있게 드시고는 수업 준비를 하던 나에게 먹으면서 하라며 과일을 깎아 주셨다. ‘표현은 못 하시지만 마음에는 정을 품고 계시는구나.’ 떫어서 잘 먹지 않았던 ‘감’이었지만 할머니가 깎아 주신 거라 그런지 달큼하고 맛이 있었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며칠 동안 계시면서 우리 집 앞뒤로 따닥따닥 붙어 있는 집들을 보면서 답답해하셨다.

늦장가를 간 큰삼촌의 어린 아들인 사촌 동생을 하루에도 수십 번 얘기하고 손주가 보고 싶다며 외갓집으로 가셨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외할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슬픈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계속 흘러내렸다.

장의사는 하늘로 가시는 할머니께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라고 했다.

“할머니, 하늘나라에 가셔서 할아버지 꼭 만나서 못 받은 사랑받으면서 그렇게 지내세요.”


그로부터 몇 년 후, 남편과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을 데리고 한적한 시골에 갔다.

울창한 산 아래 있는 그 집은 엄마와 이모들이 전원생활을 하는 곳이자 노후생활을 하기 위한 터전이었다.

큰 집 옆에 작은 집은 큰 이모네가 살기로 했다. 엄마와 작은 이모는 서울에 있다가 농사철 때 가거나 명절이 되면 그곳에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전원주택의 큰집은 장성한 우리들이 결혼하여 손주들이 뛰어놀기에 좋은 마당과 텃밭이 있었고, 집안에는 넓은 거실과 방도 몇 개 있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밖에 나간 작은 이모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집에 들어왔다.

엄마와 이모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소원을 이루었는데, 작은 이모는 왜 슬픈 걸까?

“엄마가 보고 싶어... 흑흑...”

작은 이모의 울먹임을 보고 언니가 말했다.

“나도. 우리 어렸을 때 우리끼리만 할머니 집에 갔을 때, 할머니가 이 썩을 것들아! 하면서도 한 달 동안 우리

한테 세 끼니를 매일 챙겨 줬었잖아. 그때 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도 할머니 보고 싶어.”

사촌들도 언니와 함께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울었다.

어렸을 적 항상 우리 다섯의 밥은 작은 상위에 차려주시고, 본인은 바닥에서 밥을 챙겨 드셨던 모습이...

그때는 왜 당연하다고 여겼을까? 집 앞 조그만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들로 밥상을 챙겨주셨던, 햄이나 소시지로 길들여진 입맛에 그땐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 자연식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다면 정말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가정을 꾸리며 엄마가 된 나는 고생하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말은 퉁명스럽게 하셨지만 그 속에 담긴 할머니의 사랑을 왜 이렇게 늦게 깨달았을까?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알았다면 더 잘해드렸을 텐데...

아쉬움과 후회가 담긴 물결이 내 마음을 타고 밀려왔다.




나는 가끔 꿈을 잘 꾼다. 이따금 하늘에 계신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외할머니를 꿈속에서 만난다. 어제 본 것처럼 변함없는 일상의 꿈이지만 깨어나 일어나면 ‘다들 잘 계시는구나,’ 안도하게 된다.

삶이 힘에 겨워 지칠 때, 나의 꿈속에서 조부모님들이 나를 찾아와 주신다.

그 후 며칠이 지나면 희한하게 힘들었던 일들이 조금씩 풀리곤 했다. 하늘에서 나를 지켜봐 주시는 걸까?

이 세상의 수많은 걱정과 힘듦의 시름에서 벗어나 하늘나라에 있는 나의 조부모님들이 늘 평안하게 잘 지내셨으면 한다.


어느 여름날. 파란 바다 같은 하늘에 뭉게구름들이 어깨동무하듯이 사이좋게 하늘 문턱에 걸려있다.

구름 아래 먼발치에서 홀로 서 있는 나는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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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긴 글을 읽어 주신 작가님들을 비롯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맺음을 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그 무엇이 저를 끌어당겼는지 장문의 글이

되었네요.

이 글은 전 작품 '고흐' 보다 먼저 썼는데, 나와 가족이 직결되는 작품이라 올릴까? 말까?

고민도 하였어요.

첨삭과 퇴고를 할 때마다 흐르지 않는 한 방울의 눈물들이 눈가에 맺히기도...

저의 그 한 방울의 눈물들이 이 글을 보는 여러분께는 감동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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