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선택
투명한 이슬을 머금은 초록의 잔디가 살랑이는 바람의 금빛 물결을 일으킨다. 아카시아 나뭇잎들은 하늘하늘 손짓하며 눈부신 햇살 가득한 날 ‘청설’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땅거미가 짙게 깔려 이른 저녁이 낯설기만 했던 스산한 기운이 극장 안을 가득 채웠던 그날, 스크린 속 세상은 맑고 투명한 여름이었다. 바다를 닮은 푸르른 청춘들이 그 속에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잘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는 용준은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배달 일을 시키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용준은 오토바이를 타고 어느 수영장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물심양면으로 동생을 서포트해주는 여름이를 보고 용준은 첫눈에 반하게 된다.
여름이는 청각장애가 있는 동생 가을에게 수어로 알바를 가야 한다며 밖으로 나간다.
용준은 대학 시절 배웠던 수어로 가을에게 말을 걸어 여름이의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한다. 가을은 직접 물어 보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용준은 수영장 밖으로 나오고 오토바이 고장으로 쩔쩔매고 있는 여름이에게 수어로 다가간다. 그리고 자신의 배달 오토바이를 빌려주고 그녀의 번호를 얻는다.
용준은 그녀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여름처럼 맑은 햇살을 닮은 그녀의 웃음에 그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단조롭고 지루하던 일상의 나날들 속에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아직 뜯지 않은 포장지에 곱게 쌓인 마음의 설레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여름이는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수영 실력이 뛰어난 동생 가을이를 위해 매일 수영장에 간다.
올림픽 선발전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가을이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이다. 동생의 훈련비를 대기 위해 알바도 하고, 가을이의 올림픽 출전을 위해 외국에서 쓰기 위한 수어도 배우고 있다. 그렇게 바쁜 일상 속에서 그녀에게 그는 삶의 활력을 주는 비타민 같은 존재이다.
동생을 위한 여름이의 노력 덕분에 가을은 수영대회에서 매달을 따는 쾌거를 이룬다.
그날 여름이는 청록잎들이 속삭이는 공원에서 용준과 두근거리는 첫 데이트를 한다.
여름이는 용준에게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전한다. 용준 또한 여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을 하려던 찰나 여름이의 핸드폰이 울린다. 가을이가 집에 있다가 화재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문자를 확인한 여름이는 곧장 병원으로 향한다.
그 이후 여름이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용준을 멀리하며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사고 이후 연기를 많이 마신 탓에 성적이 부진해진 가을은 언니라는 존재가 부담스럽다며 여름이에게 다시는 수영장에 오지 말라고 말한다. 그 마음을 알게 된 여름이는 큰 상처를 받는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은 애처로워 가슴이 시리지만, 본디 ‘사랑’이라는 것은 숭고하고 아름답기에 단 한 방울의 눈물은 영롱한 빛처럼 반짝인다.
‘위기’라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 속의 잠재된 다른 길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주기도 한다. 그동안 자신의 미래보다 동생에게 헌신했던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되었으면...
여름이는 청각장애가 있는 부모님 댁에 찾아가 부모님 일을 도와준다. 그리고 여름이의 엄마는 여름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을 해준다.
용준은 여름이를 잊지 못하고 그녀가 있는 수영장에 찾아간다. 거기서 여름이를 만나고 수어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여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용준의 진심을 알게 된 여름이는 용준에게 다가간다.
용준은 부모님께 여름이를 소개해 준다. 수어를 사용하는 여름이를 향한 부모님의 따듯한 배려가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용준이를 다시 만나 달라는 용준 부모님의 부탁에 여름이는 또렷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한다. 알고 보니 여름이는 자신을 빼고 가족 모두가 청각장애라서 수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자신에게 수어를 사용하는 용준이를 보면서 자신 또한 수어로 했던 것이었다.
용준과 여름이는 처음 데이트 했던 곳으로 간다. 용준은 여름이를 마주 보며 말한다.
“너를 만난 게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야.”
“엄마, 나 민수(가명)가 다시 좋아졌어.”
큰 딸아이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말한다.
“너 저번에는 민수 싫다고 하더니 다시 좋아진 거야?”
7살 딸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만난 민수의 얘기를 종종 했다. 딸이 6살 때 손을 다쳐 “아야.” 했을 때 민수가 자신의 손을 ‘후~후~’하고 불어 주어 심쿵 했던, 딸아이는 그 남자아이를 좋아했었다. 그러다가 가끔 제멋대로 굴고 선생님 말씀도 안 듣는 그 아이의 모습에 실망하여 싫다고 했다.
“민수가 나한테만 멋진 종이비행기를 접어 주었거든.”
영화 '청설'은 딸아이의 마음을 닮은 듯 사랑을 시작하는 청춘들의 순수함이 가득 한 그런 영화였다.
들을 ‘청’과 말씀 ‘설’이 합쳐진 단어로 ‘듣고 말한다.’라는 의미라고 하지만 나만의 해석으로 ‘청설’은 푸를 ‘청’과 눈‘설’을 합쳐 푸르고 눈처럼 투명하고 맑은 청춘들의 이야기라 여기고 싶다.
꿈도 미래도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으로 청춘을 채워가는 인생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에서의 아픔과 성숙을 통해 그는 앞으로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다.
가족 안의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찾지 못했던 그녀 또한 꿈을 찾아 자신을 위한 선택과 결정으로 멋진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나 또한 청초하고 푸르름이 가득한 싱그러운 마음을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