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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환희의 그 순간...

내가 엄마가 되었던 날.

by 호수공원

가을이 올 무렵, 그날은 큰 딸의 생일이었다. 딸아이의 생일과 어린이집 생일파티가 우연히도 겹쳤던 그날에 딸아이는 더욱 신나는 마음을 안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나 역시도 서둘러 준비하고 딸아이에게 ‘서프라이즈’를 해 주러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갔다.

세 명 정도 학부모들이 먼저 와 있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생일 고깔모자를 씌어 주었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좀 유치하긴 해도 동심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부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쏟아진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시선이 부끄러웠지만 딸아이를 위해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순서인 나를 보는 딸아이는 불안과 기쁨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의 웃음에 딸아이도 따라 웃었다.


생일 축하와 함께 딸아이와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집으로 가야지 돌아서려는 찰나,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고 무대 한가운데 앉아 있으라고 하였다. 나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딸아이는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한 마디와 함께 큰 절을 하였다.

나는 기특하고 대견하여 큰 딸을 꼭 안아주었다.

코끝이 찡하고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내 팔에 기대 누워 젖병에 우유를 먹고, 내 작은 품 안에 쏙 들어와 포근히 잠을 자기도 했던 딸아이였다.

그 자그마한 아기가 벌써 이만큼 컸다니, 뿌듯한 마음이 한가득 들었다.




6년 전.


“흑흑. 선생님, 너무 힘들고 아파요. 그냥 지금 빨리 아기 낳게 해 주시면 안 돼요? 흑흑.”


목 놓아 통곡했던 지난날의 기억, 진통을 시작한 지 10시간이 지났을까?

담당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평소에 인자했던 선생님은 다들 그렇게 겪는 거라며

조금만 더 참으라고 했다. 나를 달래듯 하며 돌아서는 선생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돌아서는 선생님의 그림자에서 어두웠던 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좀 늦은 나이에 남편과 결혼하였다.

그 후, 뜻대로 찾아오지 않는 임신은 그 종착역인 시험관 수술대에 나를 올려놓았다.

수면 마취에서 깬 후, 나는 참기 힘든 고통에 꼼짝할 수가 없어 휠체어를 타고 회복실에 가게 되었다.

진통제를 맞고 안정을 취한 후 집에 갈 정도로 힘든 날이었다.


그 후, 세 번의 기회에서 나는 두 번째 만에 딸아이를 임신하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기적처럼 찾아온 기쁨의 선물 같은 아기였다.

당시 내가 살았던 곳은 아기를 낳을 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짐을 싸고 친정으로 향했다.

나는 친정집 근처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만삭이 되었다.

‘출산’이라는 처음 겪게 되는 경험에 대한 걱정, 두려움과 불안함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아기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예정일이 추석 명절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서둘러 기차표를 예매하라고 하였다.

당시 자영업을 하던 남편에게 나의 말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장손이었던 남편은 당시 시할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못 온다고 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시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당장이라도 남편을 친정집에 보낼 수 있다 하셨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썬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을 전했다.


내가 여태껏 살아온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초대하는 그곳에 발을 담가야 하는 현실이 좀 씁쓸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무서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았는지, 아기는 예정일이 지나도 밖으로 나올 소식이 없었다.

결국 나는 유도분만으로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나에게 와 주었다. 나는 남편과 산부인과에 가서 유도분만 준비를 하였다.

힘들긴 해도 세상 밖으로 나올 아기를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산모들은 다음날 태어날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러 병실에 올라갔다.

나도 병실에 올라갈 준비를 했다.


‘뭐지?’


내 몸에서 축축한 물이 한가득 쏟아졌다. 진통이 시작되었다.

간호사님들은 당황스러워하며 분주하게 나를 분만실로 데려갔다.

이제부터 출산할 수 있으니 단단히 각오하라는 말과 함께 많이 아플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 몸에 무언가를 연결하였다.

나는 옆에 있는 남편을 보았다.

진통의 수치가 적혀 있는 것을 보는 화면과 그 진통을 경감시켜 주는 ‘버튼’을 누르는 것을 남편이 들고 있었다.


진통은 서서히 시작되었다.

유도분만은 일반 분만보다 더 고통이 심하다고 했다.

나는 진통의 수치가 높아질수록 남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사람을 가득 태운 기차가 내 배 위를 지나가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종착역에 사람들이 내리면 텅 빈 기차는 나의 고통을 잠시 멎게 하다가 또 사람들을 꽉 채워 태운 열차는 어느새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출발지는 있으나 도착지가 없는 것처럼, 기차는 계속 끝없이 질주하였다.


그렇게 기약 없는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듯이, 무통 주사를 맞는 순간이 다가왔다. 무통 주사액이 내 몸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나도 그 꽃잎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황홀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다시 현실에 내려앉았다.

나의 배 위에 기차는 가열차게 달리고 있었다.

그 고통의 순간에서도 잠깐 고통이 멈추면 살포시 잠이 들다가 고통이 시작되면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자연주의 출산을 지향하는 그 산부인과에서는 나의 인내심과 오기를 시험하는 듯했다.

24시간, 하루가 지났다.


드. 디. 어.


“응애! 응애!!”


그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힘겨운 고통 끝, 환희의 순간이 다가왔다.

선홍빛의 아주 작은 핏덩이가 내 품 안에 안겼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몸에 아기가 안기는 순간, 그 따스함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앞으로 나와 함께할 아기에게 내가 느낀 이 기쁨의 날들을 온전히 누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속했던 의사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순간, 아기를 낳기 전에 따스함의 기억들이 내 머리를 스쳤다.

지하철을 탔을 때 빈자리에 아무도 못 앉게 하고 오로지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 준 낯선 아주머니의 친절함과 고마움.

순댓국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내 몫까지 계산해 준 누군지 모를 한 아저씨의 친절과 호의가 뜨끈한 감동으로 전해졌던 날들이 생각이 났다.





우리 아이들과 살아갈 앞으로의 세상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움츠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더불어 살아갈 사람들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 그 마음이 비추어지는 친절과 따스함은 우리를 살아가게 할 힘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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